詩舍廊/2022습작

없는 길을 걷는 일

취몽인 2022. 2. 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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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길을 걷는 일


달리면 말러를 듣고 멈추면 이성복을 읽는 일. 컴퓨터를 켜면 먼저 시편을 읽고 갈라디아서를 몇 줄 쓰는 일. 오전에 쉼보르스카 한 편 점심 먹고 김이듬 한 편. 머리가 맑으면 차라투스트라 한 꼭지도 읽는 일. 이틀에 한 번씩 오규원의 교과서를 읽으며 전에 써둔 시 몇 편을 고쳐보는 일. 아무 일 없는 하루를 억지로 반성하는 시조 한 편을 쓰고 누군가의 사진에 홑시조로 댓글을 붙이는 일. 엽서 사이즈의 켄트지에 찔끔찔끔 식구들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친구가 소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아는 체 하는 일. 불의한 일을 성토하는 친구의 글에 좋아요 하거나 공유하는 일. 그럼에도 하루는 늘 느려 맨손체조를 하며 오후를 재촉하는 일.

잠깐 즐겁다
쉬 지치고
내팽개쳤다
금방 또 줏어담는
만 갈래 길 걷는 일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줄 알면서
아무 것도 없는 길을 걸어가는 일

그럴 수 밖에 없는
난감한 일

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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