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취몽인 2022. 5. 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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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나 / 김소연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고, 햇빛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서 네가 존경하던 큰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끓이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에 담그고, 퍼덕이는 커다란 물고기가 할아버지의 낚시 항아리에서 쉴 새 없이 퍼덕이고, 이 커다란 물고기를 굽기 위해 조금 후엔 장작을 피울 거라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나 있는 이 곳에서, 구불구불한 사람들과 하루 종일 산책을 했다고 말해줄게, 큰 나무 그늘 아래 작은 나무, 가느다란 나무 아래 가느다란 나무 교각들이 간신히 쉬고 있다고,

멀리서 한 사람이 반찬을 담은 쟁반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오고 있다고 말해줄게, 물고기는 바삭바삭하다고, 근사한 냄새가 난다고, 풍겨 온다고, 출렁인다고, 통증처럼 배가 고프다고, 준비가 다 됐다고,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수학자의 아침>문학과지성사, 2013

죽은 허수경 시인 때문에 읽게 된 시집 끝에
죽은 황현산 선생의 발문이 붙어 있다.

죽은 자들이 읽고 있는 시집이라니..

'너무 늦게 알았지만
비로소 알게 된 일들이 새로이 발생되는 것.
그것만이 지금 내게는 유일무이한
시의 목적이 되었다.'

시집 뒷표지 맨 마지막에 쓰인 시인의 시론,
그 말도 맞고

내게는
툭 알게 되는 것들, 가슴을 살짝 건드리는 울림,
그게 언어로 쓰일 수 있다면,
가볍든 무겁든 우습든 어쨌든 시라고 생각한다.

지난 밤 꿈 속에서 밤새 ‘어색함’ 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있었다.
뭔가 메모를 해야겠다고 애썼던 것 같은데
아침은 모든 것을 어색하게 다 지워버렸다.

꿈속의 어색함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유월에
이 시집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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