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498

끄트머리

. 끄트머리 늘 경계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성서와 내당동이 이어지는 반고개에서 취직해서는 신장과 천호동이 만나는 고덕 귀퉁이 사당과 과천이 만나는 남태령 언저리에서 번질 듯 말 듯 살았다 지금은 안양과 신림이 이어지는 관악산 서쪽 끝자락 비탈에 살고 있다 지금보다 더 망해 잠깐 대책없이 튕겨져 나간 적도 있었지만 쫄쫄 굶으며 돌아왔다 삼십 몇 년 끝을 말며 버텨온 서울살이 원심력은 지금도 나를 밖으로 밀고 솔직히 나도 거부하고 싶지 않은데 몸 가벼운 오목눈이처럼 튕겨 날아가고 싶은데 다 큰 딸들만 통통 튕겨져 나가고 나는 오래 경계를 따라 점선으로 박음질 됐다 넘지 못하는 담벼락에는 한 사람의 자존심이 대못에 박혀있다 도무지 녹슬지 않는 끄트머리 안으로 한발짝 210220

어쩔 수 없이

. 어쩔 수 없이 서러운 날이 있다 당신 때문이라는 말처럼 그깟 자존심 같은 것들처럼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어 입 다물고 지내는 오전이 있다 뒷목이 아프고 눈가가 떨리는 속수무책의 오후가 있다 누군가 오기로 했지만 부디 돌아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저녁이 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처럼 이제 그만 하자는 뒷 모습처럼 어서 해가 지고 나 말고도 모든 것이 귀 막히는 때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 눈 감은 나를 바라보다 한숨 짓는 순간들이 하나 둘 떠나는 서러운 날이 있다 210123

금속성 벌레

. 금속성 벌레 집안에 볼트가 출몰한다 쌀통 안에 소파 밑에 강아지 꼬리 옆에 어디선가 풀려난 볼트가 있다 25도쯤 꺽은 머리를 바닥에 기대고 몰래 어디론가 가다 딱 멈춘 볼트 화분으로 기어오르려 했는지 잔뜩 웅크린 놈도 있다 하얗게 반짝이며 등 돌린 볼트 돌아서면 또르르 사라지기도 하는 볼트 묵묵한 것들의 가슴에 박혀 어쩔 수 없던 심정을 조이던 것들이 왜 손을 놓아버렸을까 외출했다 돌아온 밤 불을 켜면 반짝이며 돌아가는 볼트들 돌아가며 박히는 소리 마디는 다시 체결되고 관절이 당겨지는 모서리 소리 제 자리를 찾았을까 곧 또 내 눈을 피해 풀고나와 서성일 볼트들 짧고 단단하고 빛나는 기억들 아무리 봐도 너트는 하나도 없는데 210207

觀聽폭포

. 觀聽폭포 책책 쌓인 청량산 끼고 후포 가다 살얼음 낀 곁길로 스며든 오후 차마 얼지 못해 가는 숨 뱉으며 떨어지던 높이 있었다 한길이 지척인데 찢어진 가슴의 깊이로 패여 저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꽝꽝 얼어붙은 지난 날들은 떨어지는 지금에 칼날 같은 상처를 벼렸다 시퍼렇게 눈 떴으나 흐르지도 못하는 발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낙차로 깎아 깊어진 마애의 탑 젖은 추녀 사이로 빠끔한 하늘에서 깨진 바람들 몰려들었다 몸서리치며 흩어지는 비명들 찢어진 귀로 꽂히는 소리 소리 들렸다 자작자작 낙엽 위로 물새 한 마리 종종 내려 앉았다 움찔 절벽의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망설이던 하늘 한 움큼 기어이 쏟아지면 하얗게 부숴지며 한 폭 더 물러서던 폭포 얼어붙은 허공을 두고 살얼음 딛고 돌아 나오는 등 뒤에서 누..

線의 목소리

. 線의 목소리 눈 쌓인 산허리 지나가는 가늘고 검은 길을 모르스 부호 같은 전깃줄이 뚝뚝 따라간다 먼 모롱이는 뭔가 할 말을 참는 듯 다 지워진 입 닦으며 사라지고 토끼똥 같은 새 한 마리 떨어지다 지워지고 허공에 뜬 하얀 집 하나 살짝 멍든 눈 껌뻑이며 바라보나니 그나마 곧 없어지리라 천지에 한 점 내 선 자리 위로 파르르 떨어지는 목소리 지금 지금 그으라 태초란 그런 것이니 210116

빠구리

. 빠구리 . . 1997년 시드니 킹스크로스 북쪽 골목을 걸어가는 나에게 '형님, 빠구리 한번 하고 가시죠'라고 말했던 블랙 프랜즈. 그 뺀질뺀질한 슬픔이 오늘 왜 새삼 생각 나는지. 빠구리 그게 왜 남반구 한 낮에 씩씩대고 있었는지 다정한 블랙 당신은 뼈 부숴지는 우리의 빠구리를 정말 아시는지 한 마디 뒤에 온 세상이 숨던 가랭이 사이 아, 아찔하던 그 컴컴 210206

고쳐가며 사는 일

. 고쳐가며 사는 일 바깥은 엄동인데 다리미 든 자리처럼 온 얼굴이 뜨겁다 육십년 육신 먹여 살리느라 삭신 무너진 어금니들 죄 뽑고 작신한 뼈밭 갈아 쇠기둥 박은 날 콧구멍 입구멍 목구멍으로 녹슨 피 흐르더니 오늘은 온 얼굴이 화통이다 떠난 것들은 아쉬운 뿌리 그러쥐고 갔을테고 새로 든 것들이 낡은 해골과 낯갈이 하는 중인가 슬그머니 시들어가던 수명 묵뫼같은 볼때기 들쑤시는 난리에 놀라 뭔 일인가 정신 추스리는 중인가 하여간 이도저도 다 내 사는 일이라 손 놓고 어지러운 땀이나 흘리고 있다 바깥은 한겨울인데 210129

횡단보도에서

횡단보도에서 빨간 불이 켜지자 풍뎅이 한 마리 불쑥 창문 안으로 날아든다 타다닥 타닥 유리창에 전신갑주를 부딪히더니 구석에 쿡 쳐박혀 꼼짝을 않는다 창문 열고 손가락 튕겨 쫒자 비척비척 날아서 제 하늘로 돌아 간다 파란 불이 켜지자 출발하던 차들이 모두 움칫 까치발을 한다 미이오 미오 고개 내밀어 쳐다보니 작은 신발의 사람 하나 꼼짝을 않는다 넋나간 택배 기사 고함치고 흔들어도 모로 누운 할머니 벌써 하늘로 가신 듯 하다 210121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