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498

失年  2020

. . 失年 2020 마지막 직장을 잃었다 어금니 두 개 오른쪽 손목의 건강 수많은 정의와 神를 잃었다 두 딸을 잃었으나 독립했으니 잘된 일이다 대부분의 빚을 잃었고 몇몇 통장과 카드를 버렸다 친구 몇도 잃었다 겁 없던 詩는 버렸고 영화를 거부하던 취향을 잃었다 당구는 50점쯤 잃었고 승률도 잃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쉰줄을 잃었고 치명적으로 어머니를 잃고말았다 201231

2020  가을 노래

. 2020 가을 노래 1 호암산 정수리가 붉다 종일 흐렸으나 느리게 오는 가을 기다려 주느라 비는 꾹 참고 내리지 않았다 2 그제 비 내렸다 오늘 어딘가는 눈도 내렸다 한다 오른쪽을 조금 잃은 달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기운다 바람이 심상찮으니 내일은 걸음걸이가 좀 빨라질 것이다 3 저녁이 서두른다 동향의 집은 마음이 더 급하다 어딘가에서 낙엽 쓰는 소리 어둑하다 산책하는 강아지 어리둥절하다 발끝에 차이는 가을들 어찌할 줄 모른다 4 다 떠나고 빈 벽에 붙들린 단풍 한 닢 목마르다 쉴 곳 없는 바람이 지나가고 계절은 모조리 꼬챙이 색깔들은 어디로 갔는가 먼 산 늑골이 깊다 201209

17번 대기실

. 17번 대기실 문 없는 문을 들어서면 문보다 조금 넓은 방 그 끝은 완고한 유리벽 너머로 긴 회랑의 끝 너머로 육중하게 닫힌 문과 가운데 난 작은 창 어머니를 수레에 싣고 온 여자가 인사를 하고 우리도 목례를 하고 여자에게 어머니에게 두꺼운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가고 문이 닫히고 여자는 다시 인사를 하고 빈 수레를 끌고 사라지고 작은 창에 노란 불빛이 켜지고 아내는 울고 동생은 이를 악물고 어머니가 누운 긴 나무 관과 한 생애가 한 줌이 되는 시간과 빛을 바라보고 있는 문 없는 문 안에서 차례차례 다음 순서가 쌓이고 있는 두 세대가 한 세대를 유리창 너머로 보내는 좁은 사각형의 방 안에서 201209

두 달

. .두 달 . 책상위에 아버지가 남긴 촛대에 촛불을 켜고 차마 치우지 못하는 어머니의 손지갑을 꺼낸다 삼십오년전 일본 출장길에 사서 드렸던 까만 가죽 손지갑은 겉이 닳고 한쪽 모퉁이가 터졌다 그 속에는 카드 두 장 쌈지돈 18,170원 그리고 집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 떠나가는 스스로를 믿지 못해 남겨둔 돌아와야 할 곳 그 깊은 서러움이 들어 있다 벌써 두 달 까마득한 곳으로 가면서 그만 놓고 간 돌아올 주소와 비상금 그걸 들고 어둑한 기억의 촛불을 태운다 오랫 동안 버리지 못할 손때와 불안을 꼬깃 접어 너덜한 검은 지퍼를 닫고 맨 아래 서랍에 다시 넣어둔다 두 달 촛불도 끈다 201124

소문

. 소문 쇠 깎는 소리를 낸다는 시인의 시집을 옆구리에 차고 남쪽 여행을 다녀왔다 밤늦도록 무뚝뚝한 술을 마시고 겨우 일어난 아침에 누가 말했다 하나 남은 깃발마저 치워버릴 수 없어 허물을 감추고 있다고 돌아오는 길 다시 펼친 시집에는 금이 가 있었다 이틀 사이에 시는 붉게 녹슬고 말았다 함성 뒤에 감춰진 비명이 들렸다 더 이상 철판을 깎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마저 읽었다 시는 시니까 쇳조각 하나 툭 떨어졌다 201103

소식

. 소식 . . 지난 밤 딸아이 꿈속에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단다 잘 도착했다 하고 딸과 어머니는 생전처럼 수다를 떨었다는데 그 꿈을 전하며 한참 운다 멀긴 먼가보다 떠나신 지 스무 날만에 닿으셨다니 거기도 전화가 있으니 살 만한 곳인가보다 왜 아들 대신 손녀에게 전화 하셨을까 삐지셨나 말주변 없는 아들이 재미 없다 싶으셨나 그래도 잘 도착하셨다니 다행이다 없는 어머니가 도착한 없는 곳 그 곳에도 전화가 있다니 잘 때 핸드폰 잘 챙겨야겠다 꿈 속의 부재중 전화는 얼마나 속상할까 심심하면 제게도 전화주세요 잘 도착하신 어머니 201017

절연의 기쁨

. 절연의 기쁨 아빠 죽으면 하루 정도 아쉬워하고 돌아서 네게 남은 날 긴 넝쿨 하나 잘려나갔음을 기뻐해라 너와 함께 한 반 평생 아쉬움은 하루로 족하고 남은 것은 오직 기쁨뿐 그러니 기뻐해라 너의 화려한 삶을 위해 아빠의 역할은 이제 끝났으니 너는 그저 기쁘게 살아가거라 이런 글을 언젠가 써뒀었는데 엄마가 죽었다 기쁘게 살아갈 수 없다 딸들아 2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