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498

팔월

. 팔 월 입추. 서쪽 바람 불어온다. 아무 말도 하기 싫은 하루가 지난다 * 한 석 달 내던져놨더니 詩란 놈이 눈치보며 기웃거린다. 그때 그녀에게도 이랬어야 했나 * 여름 식어간다 어깨, 무릎까지 식었다 겨우 책의 체온이 됐다 * 누군가 빨간 줄을 친 詩에서 빨간색을 지웠다 살아남은 詩가 희미하다 * 비싼 무인도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불가사의하게 하루가 짧다 * 절반, 실망과 희망이 같이 걸린 빨랫줄 같은 곳 * 사람의 발고로 사람을 미워한다 발고한 사람도 밉다 다 사람인데 * 모기 한 마리 며칠째 발목을 노리고 있다 * 친구에게 詩는 그저 느끼면 되는 거야 라고 말하고 나니 詩가 고개를 푹 떨궜다 * 비가 먼저 와 올 수 있었던 사람은 출발하지 않았다 나의 일이 아니다 * 나는 당신을 잘 모르는 게 ..

회색의 꿈

. 회색의 꿈 밧데리골목 즐비한 노래빠들을 지나며 스틸레인은 녹슨 노빠를 이야기 한다 세상은 온통 부조리 따지지 않으면 바꾸지 않지 쉬지 않는 분노가 빚진 자의 집을 지난다 시장급 시민을 아시는지? 세상은 온통 모자라 가르치고 지적해야 조금이라도 나아져 나아졌냐고? 나아지지 않았을까? 먼 도라에몽이 빙긋 웃는다 떡수는 점점 침착해지고 있다는군 아모스는 여전히 자격증을 모으고 맑은 한울은 예전처럼 달리지 못한다 정의는 그저 술을 부르고 우리는 모두 가난해졌는데 왜 이렇게 할 말은 많은 것일까? 석달치 월세를 잔고로 껴안고 회색은 도배일을 배우고 부엉이 바위는 자꾸 높아지는데 비는 왜 자꾸 내리는지 안양은 그저 인덕원에 역이 생긴다 환호할뿐 여기서는 아득히 먼데 회색도 자꾸 희미해지는데 210826

이상한 날

. 이상한 날 손님 하나 없던 한 주를 보내고 아내와의 쓸데없는 전쟁도 겨우 끝내고 촘촘히 쌓였던 술독도 거진 빠진 일요일 오후 둘째가 잠깐 다녀가고 첫째가 오고 있는 시간 햇볕 여전히 쨍한데 비가 내린다 동쪽 창 너머 호암산엔 쌍무지개가 걸렸는데 서쪽 창 하늘엔 석양이 타는 노을과 비와 무지개가 뒤섞인 풍경 사이 어쩌자고 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은 두 시인 피고 최영미와 원고 고은의 두 시집을 읽고 있나 피고는 신란하고 원고는 선문답 서쪽엔 석양 동쪽엔 무지개 그 사이에 비 내리고 도대체 시는 왜 여기 있는지 210808

풀 뽑는 사내

풀 뽑는 사내 길가 은행나무 아래 나무껍질 같은 늙은이 하나 쪼그려 풀을 뽑는다 호미도 없이 마른 손으로 풀과 싸운다 땅에서 막 뽑혀나온 것 같은 발목 곁에는 쓰러진 풀 몇 포기 메마르다 격자의 보도 블록은 온통 시멘트 흙이라곤 가로수 밑 한뼘이 전부인데 거기라도 비집고 살겠다는데 늙은 사내는 사정이 없다 손톱 끝 디밀어 뿌리까지 뽑는다 붉은 맨흙 다 드러날 때까지 무엇이 저 생에게 반듯함을 강요했을까 끼니를 지켜야했던 고향의 습관일까 각 잡아 담요를 개던 군막의 기억일까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 기어 오르는 것들은 처단하라 각인된 윗자리들 서슬일까 아랫도리 말갛게 드러난 은행나무를 딛고 사내는 구부정하게 사라지고 숨어있던 쑥부쟁이 한 톨 그새 솟을 궁리를 하고 은행나무는 하릴없이 쓸쓸하고 210610

비빔국수

. 비빔국수 움직이지 않는 내 다리가 내심 아쉬워 아내는 자꾸 움직이라 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줄 알면서 그래도 움직여 보라 말 하는 아내에게 움직이지 못하는 울화를 쏟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게 내 탓이냐 움직이도록 하는 게 바램 아니냐 아내는 화를 내고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거듭 움직이라 말하는 건 폭력이다 나도 화를 냈습니다 모처럼 집에 왔던 딸들 영문도 모르고 얼떨떨하게 다 제 집으로 가고 조는 강아지 사이에 두고 서로 입 다물고 있었습니다 속 모르는 사람, 각자 속으로 그랬습니다 뚝딱뚝딱 참기름 냄새 나더니 비빔국수 두 그릇 상에 놓였습니다 아내는 검은 고명처럼 암 말 없고 저는 옆으로 설설 기어 딸이 숨겨 놓은 소주를 더듬었습니다 국수 가닥 깊이 잘 버무려진 묵은 김치를 찾아 한 잔에 한 점 목 ..

겹 健忘

. 겹 健忘 몇해 전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었다 지난 해 헌책방에서 사서 또 한번 읽었다 오늘 다른 책을 찾다 책장 한 귀퉁이에서 언제 샀는 지 모르는 이 책을 발견했다 그저 편한 시인이 고른 좋은 시들이 담긴 책인데 사서 읽었음 기억이 나야 했는데 빌려서 읽을 때도 새로 사서 읽을 때도 첫 기억은 까마득 했을까 결국 그간 꾸역꾸역 읽은 책들이란 것도 이런 형편 아닐까 알 수 없는 어느 구석에 쳐박혀 굳은 각질처럼 두텁게 잊혀지거나 어느 때 잠깐 스쳤던 사람에 대한 기억처럼 풀풀 날아가버리는 그런 것 그러면 또 어떤가 딴 짓 하며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잠깐 웃다가 하던 짓 계속한다 하더라도 웃은 건 좋은 것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기왕에 다시 나타났으니 또 읽자 까짓것 210227

쓸데없는 계산

. 쓸데없는 계산 늙은 시인의 시를 읽다가 문득 어떤 거리를 생각해본다 발목 아프고 나선 한 번 나서 백 걸음이 버거운 처지 이래저래 하루 삼백 미터나 겨우 걷는다 치면 남은 세월 내 발로 걸어갈 길 편도 삼백 킬로 대구 세 번 오갈 거리쯤 되겠다 어느 친구는 마라톤 사십 킬로를 뛰기 위해 한 달 동안 삼백 킬로를 뛴다는데 그걸 벌써 열댓 번 했다는데 걸어서 아버지 산소 세 번 겨우 오갈 수 있는 여분이라니 그나마 발목 더 가물면 더 줄테니 어쩌면 한 번 왕복 정도만 남았을 수도 세상살이 내 걸음만으로 가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동력을 상실한 동체의 한계는 어쩔수 없이 서글프다 천천히 내려가야할까? 남은 걸음이 부족하면 거리를 좁힐 수 밖에 없는 법인데 가까이 가야할까? 그런데 어디로? 이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