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깊이
황소와 강아지와 아기의 깊은 눈은
까맣고 촉촉하고 투명한 거울이다
그 곳에 나를 비추면 한 슬픔이 젖는다
때 묻은 마음 속엔 거울마저 사라져서
황소와 강아지와 아기에 비춰서만
아슬히 만날 수 있는 깊고 착한 그런 것
가시
갈치를 바르면서 당신을 기억한다
지느러미에 촘촘한 참빗 같은 아픔들이
이제는 바싹 구워져 핏빛마저 고소한데
한 켠엔 날카롭게 설움들 추스리며
같은 길 걸었으니 미워도 할 수 없어
새하얀 이밥 숟갈 위 얹어주는 한 토막
가늘고 뾰족하게 살 박힌 그 삼십 년
하여간 당신이야 내편이 아니라오
글쎄요 언제쯤이면 그 미움이 뽑힐까
새우
펼쳐보지 못했다고 꿈 없다 할 수 없다
몸 휘어 웅크리면 뒤로 비록 튕겨가도
구부려 휜 등 속에는 오장육부 가득해
먹구름
아래가 후끈 달아 불끈 위로 올라섰다
위에도 위가 있어 두께가 생겼는지
손마다 깍지 걸고서 낮은 하늘 한 가득
아래는 차곡차곡 어둠만 쌓여가고
서럽다 쿡 찌르면 벼락만 한바탕씩
오지도 않은 장마는 저 멀리서 발 동동
페이스 아웃
거리에 얼굴 하나 걸어 놓고 돌아 왔다
수많은 얼굴들이 그 앞을 지나 가고
누구는 얼른 디밀어 제 얼굴을 겹쳐 놓고
해질녘 너덜해진 얼굴을 걷어내선
책 상 위 펼쳐 놓고 뒤적여 살펴 보면
진종일 몰려 살폈던 눈치들만 덕지덕지
어느 날 아침
나는 또 나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나
가득히 빈 어제는 그림자만 충만하다
태양은 참 멋모르고 저 혼자서 웃는데
미꾸라지
진창은 은밀한 곳 바닥에 뒤섞여서
있는 듯 없는 듯이 그렇게 사노라면
질펀한 하루하루도 느긋하게 흐른다
보이지 않는 생계 눈 앞은 침침한데
보이지 않으므로 더듬어 가야한다
아래만 휘적거려도 행복할 수 있는데
논둑을 튀어나면 세상은 밝아지고
진창도 씻겨 나가 말갛게 살겠지만
빛 나는 길이 있을까 그 길 갈 수 있을까
물 위로 끼니 하나 파르르 날아오네
박차고 솟아 올라 낚아채는 생계여
만사가 부질없는 것 진창속이 도솔천
도서관 풍경
오늘 걸을 길이 없어 내일 길을 걷는다.
입 다문 사람들만 가득한 도서관에
발정 난 아카시아 꽃 산더미로 피었다
안개와 가는 비에 모질게 씻겨 나가
벌 하나 나비 하나 꼬드길 향도 없다
마른 침 거푸 삼키며 책갈피만 넘긴다
가을로 출근하는 일
내 앞쪽 열 시 방향 노인들 낡은 수다
그것도 남자 둘의 곰팡내 나는 격론
세월은 늙지도 않아 저 혼자만 제자리
긴 계단 기어올라 떠날 준비 하는 나무
노랗게 짐을 싸는 나뭇잎을 보느니
마음엔 빈 바람 불어 마른 기침 한 바탕
오래된 시집 한 권 한 쪽에 미뤄 놓고
잠 덜 깬 높은 하늘 무표정을 바라본다
아침이 차곡히 쌓여 늙어가는 한 시절
나무들 소문없이 켜켜히 익어가니
빈 손의 말일에도 웃음은 잃지 말자
정겹게 늙기 위해선 가벼워도 무겁게
*2020 대구시조문학 응모
질경이
질펀한 숲을 떠나 길 나선 풀 한 포기
갈라진 길바닥에 질경이 피었습니다
밟아라 고함 지르는 모진 애비 질경이
꾹꾹 찍는 걸음 틈에 납작 잎 엎드리고
성질 머리 겨우 세운 지친 애비 질경이
흙먼지 덮은 오기만 뾰족뾰족 합니다
자벌레
세상을 따지겠다 달려온 날 있었어요
뙤약볕 한 식경에 딱 한 마디 지났지만
한 조각 그림자 끌며 주저앉지 않아요
내 삶의 길이가 내 닿는 세상 전부
온 몸을 접어야만 한 걸음이 가능해도
까짓 것 가는 데까지 한 번 가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