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時調

개작 8편 161019

취몽인 2016. 10. 19. 09:23

 

 

 

어떤 깊이

 

 

 

황소와 강아지와 아기의 깊은 눈은

까맣고 촉촉하고 투명한 거울이다

그 곳에 나를 비추면 한 슬픔이 젖는다

 

때 묻은 마음 속엔 거울마저 사라져서

황소와 강아지와 아기에 비춰서만

아슬히 만날 수 있는 깊고 착한 그런 것

 

 

 

 

 

 

 

 

 

가시

 

 

 

갈치를 바르면서 당신을 기억한다

지느러미에 촘촘한 참빗 같은 아픔들이

이제는 바싹 구워져 핏빛마저 고소한데

 

한 켠엔 날카롭게 설움들 추스리며

같은 길 걸었으니 미워도 할 수 없어

새하얀 이밥 숟갈 위 얹어주는 한 토막

 

가늘고 뾰족하게 살 박힌 그 삼십 년

하여간 당신이야 내편이 아니라오

글쎄요 언제쯤이면 그 미움이 뽑힐까

 

 

 

 

 

 

 

 

 

새우

 

 

 

펼쳐보지 못했다고 꿈 없다 할 수 없다 

 

몸 휘어 웅크리면 뒤로 비록 튕겨가도

 

구부려 휜 등 속에는 오장육부 가득해

 

 

 

 

 

먹구름

 

 

아래가 후끈 달아 불끈 위로 올라섰다

위에도 위가 있어 두께가 생겼는지

손마다 깍지 걸고서 낮은 하늘 한 가득

 

아래는 차곡차곡 어둠만 쌓여가고

서럽다 쿡 찌르면 벼락만 한바탕씩

오지도 않은 장마는 저 멀리서 발 동동

 

 

 

 

 

 

  페이스 아웃

 

 

 

    거리에 얼굴 하나 걸어 놓고 돌아 왔다

    수많은 얼굴들이 그 앞을 지나 가고

    누구는 얼른 디밀어 제 얼굴을 겹쳐 놓고

 

    해질녘 너덜해진 얼굴을 걷어내선

    책 상 위 펼쳐 놓고 뒤적여 살펴 보면

    진종일 몰려 살폈던 눈치들만 덕지덕지

 

 

 

  

 

 

 

어느 날 아침 

 

 

나는 또 나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나 

가득히 빈 어제는 그림자만 충만하다

태양은 참 멋모르고 저 혼자서 웃는데

 

 

 

 

미꾸라지

 

 

진창은 은밀한 곳 바닥에 뒤섞여서

있는 듯 없는 듯이 그렇게 사노라면

질펀한 하루하루도 느긋하게 흐른다

 

보이지 않는 생계 눈 앞은 침침한데

보이지 않으므로 더듬어 가야한다

아래만 휘적거려도 행복할 수 있는데

 

논둑을 튀어나면 세상은 밝아지고

진창도 씻겨 나가 말갛게 살겠지만

빛 나는 길이 있을까 그 길 갈 수 있을까

 

물 위로 끼니 하나 파르르 날아오네

박차고 솟아 올라 낚아채는 생계여

만사가 부질없는 것 진창속이 도솔천

 

 

 

도서관 풍경

 

 

 

 

 

 

 

오늘 걸을 길이 없어 내일 길을 걷는다.

 

입 다문 사람들만 가득한 도서관에

 

발정 난 아카시아 꽃 산더미로 피었다

 

 

 

안개와 가는 비에 모질게 씻겨 나가

 

벌 하나 나비 하나 꼬드길 향도 없다

 

마른 침 거푸 삼키며 책갈피만 넘긴다

 

 

 

 

 

 

 

 

 

 

가을로 출근하는 일

 

 

 

내 앞쪽 열 시 방향 노인들 낡은 수다

그것도 남자 둘의 곰팡내 나는 격론

세월은 늙지도 않아 저 혼자만 제자리

 

긴 계단 기어올라 떠날 준비 하는 나무

노랗게 짐을 싸는 나뭇잎을 보느니

마음엔 빈 바람 불어 마른 기침 한 바탕

 

오래된 시집 한 권 한 쪽에 미뤄 놓고

잠 덜 깬 높은 하늘 무표정을 바라본다

아침이 차곡히 쌓여 늙어가는 한 시절

 

나무들 소문없이 켜켜히 익어가니

빈 손의 말일에도 웃음은 잃지 말자

정겹게 늙기 위해선 가벼워도 무겁게

 

 

*2020 대구시조문학 응모

 

 

 

 

 

 

 

 

질경이

 

 

 

질펀한 숲을 떠나 길 나선 풀 한 포기

갈라진 길바닥에 질경이 피었습니다

밟아라 고함 지르는 모진 애비 질경이

 

꾹꾹 찍는 걸음 틈에 납작 잎 엎드리고

성질 머리 겨우 세운 지친 애비 질경이

흙먼지 덮은 오기만 뾰족뾰족 합니다

 

 

 

 

 

 

 

 

자벌레

 

 

세상을 따지겠다 달려온 날 있었어요

뙤약볕 한 식경에 딱 한 마디 지났지만

한 조각 그림자 끌며 주저앉지 않아요

 

내 삶의 길이가 내 닿는 세상 전부

온 몸을 접어야만 한 걸음이 가능해도

까짓 것 가는 데까지 한 번 가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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