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북향 길 내달려도 못 가는 곳이 있어
달리는 걸음마다 뒷목을 잡아챈다
도처에 속도 붙드는 저 역설의 자유로
촘촘한 철조망 뒤 멈춘 듯 흐르는 듯
깊은 속 못 내비쳐 멍든 듯 시퍼렇다
긴 수직 빛을 쏟으며 달려가는 강이여
바람벽 격자 사이 가을 볕 분주한 곳
나락은 여기저기 저 혼자 익어가네
개성과 강화 사이엔 적막만이 흐르고
옛날은 어디 갔나 그림자 낚는 어부들
숨겨진 총부리들 물결 따라 흐르는데
저 강도 가슴이 아려 썩어가는 물결들
허리춤 매달아 온 눈물 몇 점 흘리다가
눈가로 깊이 새긴 그리움 훔쳐내고
휘돌며 고개 돌린 강 피 흘리는 임진강
능소화
자유로
가로등에
곱게 늙은 아줌마들
제각기
고개 숙여
웃는지 우는 건지
바람이
코를 스치자
부끄러움 후드득
달력
시간을 잔뜩 입고 둥글게 말렸었다
뒤집어 애써 펼쳐 못 박아 걸었지만
한사코 다시 말리던 인두겁의 긴 한 해
벗겨지고 찢겨지고 꼬투리 남은 시간
남루한 기억들은 어디를 날고 있나
혼자서 속곳 가리는 달랑 한 장 십 이월
霧霜
동짓날 밤이 길어 서러움 맺혔구나
마른 풀 귀밑머리 남 몰래 감추더니
하얗게 일어섰구나 아침 해를 비추며
막 깨어난 산허리 지우며 걸어가는
저 노인 뒷모습엔 한 세월 얹혔구나
물안개 희미한 모습 아침도 깊은 동짓날
남겨진 이름
여든 여섯 긴 고개 힘겨운 눈을 감아
난생 처음 걷는 꽃 길 함께 웃는 하얀 길
보따리 걸음 한 십 년 바느질 길 또 십 년
그 길에도 얼기설기 드문 꽃은 피었지
지금은 꽃 사이로 향기 없는 꽃이 되어
내 속의 너희들 향해 마른 웃음 남기네
슬프고 기쁘게 웃을 수 있는 시간
웃음 사이 자글자글 너희들의 이름들
그 아래 조용히 새긴 떠나가는 내 이름
할머니 우리 엄마 형수님 호명 말고
정말로 오랜만에 불러지는 내 이름
이제는 다시 못 부를 나를 두고 떠난다
하조대(河趙臺)
언덕 넘어 빈 마음을 버리러 갔을 때
모래 섞인 바람 한 줌 슬쩍 마중 나왔다
머리채 흔들어 대며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다가오다 부숴지고 엎드려 물러서던
그러나 손 내밀어 움켜잡던 그대여
기억이 쌓인 사구 위 전봇대들 긴 행렬
경계마저 슬프게 아름답던 오후 시간
우리 모두 떠난 후에 고개 높이 쳐들고
어둠 속 잠들 때까지 바라보다 바라보다
멍든 속살 설핏 비춰 일어서던 하조대
등 돌려 길 달려도 귀는 아직 그대 곁에
푸른 멍 가슴에 남긴 울음 소리 담은 채
금강
마른 산
발목만
부여잡은 저 계곡
꽁꽁 언 마음 위에
백 만개 형형한 눈
차라리
먼저 떠나라
쩡쩡 우는 저 금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