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얼추 30년 전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다.
그는 아직 양동 그늘에 살고 있었고
지게품을 팔다 벌이를 놓치면 피도 팔아
어김없이 오는 밤에게 술을 사고 살았다.
광화문 교보문고 뒷골목, 피맛골 초입에
반지하에 찌그러져 있던 시인통신은
사며 취하는 놈들과 얻어 먹으며 취하는
놈들이 뒤섞인 아사리 술판이 매일 열렸는데
귀때기 새파란 신입시절의 나는 사며 취하는
족속이었다.
어느날 버쩍 마른 노가다가 자정 넘어
반쯤 취한 술판에 털썩 들어왔는데
낮에 판 피로 마신 술이 다 깨서 다시
취하러 왔다고 했다. 그가 다시 취하도록
술을 샀는지는 기억에 없고 날 밝은 피맛골
시인통신에서 길 건너 회사로 바로 출근했던
기억은 있다.
피를 팔아 술을 마시는..
피를 팔아 마신 술로 시를 쓰는,
그를 그 후 몇 번 더 봤고 곧 시집이 나온다는
말을 전한 후엔 다시 보지 못했다.
대신 시는 꾸준히 만났다.
술로, 밥알로, 피로, 지게로, 노동으로..
삼십 년 지나 그 무렵의 그를
다시 읽는 일은 여전히 처연하다.
아마 지금은 형편이 분명 나아졌겠지만
그의 팔뚝에 꽂힌 매혈의 바늘 끝으로
여전히 뽑혀 올라가고 있을
설움. 분노 같은 것들이
페이지마다 튀쳐오르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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