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한 권 읽고 시인에게 송구한 마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출근 길, 잠시 잠시 멈춘 차 안에서 보름 걸쳐 읽은
詩들은 오늘 아침 덮을 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읽으며 접어 둔 쪽들을 다시 펼쳐
읽어 본다. 그냥 그렇게 스쳐 가지마라. 詩들이 면박을
한다. 다시 손가방에 집어 넣고 언제 조용한 찻집에
앉아 공손하게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조정권의 시셰계는 10년전까지는 가파른 산정을
향한 수직적 상상력을 통해 추구해 나갔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수평적 상상력을 통해 추구하고 있다."
(홍용희 해설)
시집 뒤 홍용희평론가의 말처럼 명징하고 고절한
목소리로 높은 정신을 깨우던 조정권시인, 산정묘지
의 시인. 그는 그 사이 그 곳의 맑음을 다 들이마시고
내려와 있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세상을 걸으며 가볍게
살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눈 덮인 산은 여전히 그자리에 있듯 지긋이
감은 시인의 눈 속에는 여전히 성성한 정신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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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흔적
1
삼십여년간 선시(禪詩)를 뒤적이다가
팔순을 넘긴 노인은 거적을 덮었다
작고 시인으로 취급해버린
문단의 건망증쯤 아랑곳 않고
가벼운 지팡이 하나남 든 채.
2
다시 얻기 어려운 몸 여미고
그는 혼자 천산(千山) 눈보라길로 올랐다
마늘이 아니고서야 어찌 마늘의 마음을 알랴.
서른여섯에 만났던
소나무 아래 동자 만나러.....
3
사흘밤낮을 올랐을 때 산중턱을 가로막는 눈을 만났다
여긴 구름밖에 안 산다오
아시겠소
더 가보아도 구름밖에 없다오
구름이 눈 뿌리는 걸 보니
아직 힘이 남아 있구나
그는 굴에서 하룻밤 눈을 피했다
4
깨어나보니 까마득한 신봉(神峰)에
바위 소나무 서 있다
거기 기거하시던 스승
사모하는 마음 높이 올라간 만큼
멀리 떨어질 위험도 큰 것이다
5
소나무 아래 차 끓이던 동자 간 곳 없다
구름만 앉아 있다
구름의 귀에 대고 조심히 묻노니
예 있던 동자 어디 계시는가
오래 전 약초 캐러 나간 스승 찾아 눈발 속으로 떠났는데
두 사람 다 돌아오지 않았다 했다
6
차 끓이는 차구 앞에 노인은 동자처럼 앉아본다
맨손으로 추위를 견디던 동자처럼 안 계신 스승 마음 본떠 앉아본다
세상은 그동안 큰 눈이 여러번 왔었고
이곳엔 얼음이 수차례 다녀갔구나
다완에 금 간 걸 보니 겨울이 아직 힘이 세구나
7
노인은 앉아 있다
팔순까지 온 세상 큰 추위 여러번 왔었다
제때에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태만
노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게으름이 여지껏 나를 살려놓았구나
8
노인은 산에서 내려와 삼년 동안
얼음 어는 소리 듣다가
운처럼 바위 밑으로 흘러갔다
9
마음에 한지 바르고
다시 한번 옥매(玉梅)가지 고요히 품어본다
비쩍 마른 노인
붓끝레 마늘씨 물고
이 척박한 세상의 마음에 심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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