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책과 문화 읽기

사람의 아들 예수 /칼릴 지브란

취몽인 2020. 1. 24. 17:42



 


평생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기독교 신학의 금과옥조라고 할 수 있는 창조, 부활, 재림, 성육신, 영생, 구원 같은 것에

나는 비교적 별 관심이 덜하다.

 

그렇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초월자는 분명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으며

그를 느끼고 싶고 그의 의지에 따라 살 의향이 있다.

 

그는 아직도 내게서 멀다.

나는 그저 더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

일주일에 한 두 시간이라도

잘 모르는 그를 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경외하고

내가 그를 잘 모른다는 불경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부른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삶에서

그나마 그에게로 다가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내게 가르쳐 준 존재는 예수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복음서에서 전해지는 그의 말들을 거듭 읽고

숨겨진 진리를 그 속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밖에도 예수는 내 삶의 많은 기준을 세워주었다.

내게 눈곱만큼이라도 정의, 사랑 따위의 가치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다.

 

칼릴지브란이 예수를 말하는 것은 뜻밖이다.

그가 속한 문화권 탓일 것이다.

그는 레바논 사람이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

근동의 종교가 용광로 속 쇳물처럼 녹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가소로운 것인지 모른다.

예수는 인류의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저 크리스찬의 구세주, 聖子일뿐 아니라

인류 정신사의 찬란한 불빛이다.

그런 그를 누군들 유심히 보지 않겄는가.

선불교의 큰어른이었던 성철스님도

히브리어 성경, 영어 성경을 여러번 읽었다 하지 않았던가.

 

특이한 것은 형식으로

성경 속 예수와 같이 호흡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예수의 모습과 정신을 전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내용은, 칼릴지브란이란 정신의 크기에 비해 소박하다.

내가 못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예수는 그렇게 대단히 포장, 해석되기 보다는

그 존재 자체가 의미이므로 다른 대단한 재해석이

불가능 또는 불필요 할 수도 있다.

 

그저 내 인생 깊은 곳에 빛나는 작은 등불인 예수를

존경하는 또 다른 거룩한 영혼의 목소리로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