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책과 문화 읽기

나무를 안아보았나요/조안 말루프

취몽인 2020. 1. 24. 17:20

 

설 연휴 첫날이다.

모처럼 이틀을 쉰다.

다른 식구들은 나흘을 쉬지만

그저 이틀을 쉬어도 고맙다.

이렇게 이어서 쉴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

이틀 쉬는 일은 소중하다.

내일은 설날이니 어머니댁에 세배도 가야하고

온전히 쉴 시간은 그저 오늘 하루인데

아내 도와 전 부치고 모처럼 딸들과 외식도 하고 오니

벌써 해질녘이다.

 

그래도 느긋한 저녁,

잠시 멈췄던 법정 추천 책 다시 읽기를 또 시작한다.

헬렌 니어링의 책과 이 책을 양 손에 들고 고민하다

이미 한번씩은 읽은 적이 있는 두 책이지만 그 중에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정도를 따지다 이 책을 읽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저자는 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다. 메릴랜드에서 생물학과 환경학을 가르친다. 전공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나무에 대한, 나무와 관련된 작은 우주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에서 그 세계를 사랑하며 살고 또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일은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내겐 오래된 특별한 친구가 하나 있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부터 같은 교회를 다니며 함께 자라온,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어도 서로 각별한 친구다. 그 친구의 옛날 집은 우물도 있었고 집 뒤로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름 대도시인 대구에서 변두리라해도그런 풍경을 보는 건 당시에도 쉽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친구는 대학에서의 전공과는 무관하게 식물과 관련된 출판일을 하게 되었고 그 일에몰두하다 공부도 나날이 깊어져 이 친구가 출판사 사장인지 양치식물학자인지 분간이 잘 안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이 친구 삶의 궤적이 나로서는 참 좋아보이고 한편 적잖이 부럽기도 하다.

 

어쨌든 책 속에는 여러 나무들이 등장한다. 버즘나무. 풍나무, 측백나무. 참나무. 아카시아 등등 이들 나무 하나 하나의 이름은 제각기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는 사실을 저자는 나무를 껴안는 마음으로 사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나무의 삶과 나무와 더불어 사는 삶. 그리고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까지 키 큰 나무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나 또한 최근에 나무에 대한 관심이 자꾸 더해지는 터라 저자의 애정 깊은 나무 이야기들은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책을 덮으며 떠오르는 생각 하나.

 

우리가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서양버즘나무. 가로수로 많이 심겨져 있고 늦가을 가장 늦게 어른 얼굴만한 낙엽을 떨어뜨리며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 화려한 꽃을 피우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봄이면 무자비하게 가지를 잘라내지만 여름을 지나며

다시 무성함을 회복하곤 하는 서러운 숙명의 플라타너스가 사실은 본토에서는 수백년을 거뜬히 사는 우리네 느티나무 같은 존재이며, 더 나이들면 몸통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는 서사가 있는 생명이란 사실이다. 앞으로 길가에 울퉁불퉁한 몸통으로 무심히 서 있는 이 나무를 보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다.

 

저자가 가끔 건낸다는 질문 하나.

'내가 살아있는한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나무가 있나요?'

 

문득 어디 외로운 플라타너스 한 그루 만나면 덜렁 약속을 해버리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