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2습작 29

몽당연필

. 몽당연필 사는게 유난히 힘들 때나 저 앞에 일렁이는 죽음이 괜스레 기웃거릴 때는 하늘을 봅니다. 언제부터 그랬는 지는 묘연합니다. 하늘도 훤한 대낮은 그렇고 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적당합니다. 가늠할 수 없는 허공 지금도 넓어지고 있다는 저 궁륭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무한 미분합니다. 모자란 생활비나 정의 같은 것들 먼지보다 작은 내 속 있지도 않은 것이 됩니다. 마음 속에는 어릴적 몽당연필 하나 있습니다. 검지 손가락만한 길이 뾰족한 검은 심처럼 나는 느닷없이 왔고 뭉게진 지우개끝처럼 또 갈 것입니다. 짧은 주제에 더 닳고 있으니 인생은 딱 그만큼입니다. 무한광대 침묵의 하늘을 보고 가슴속 몽당연필 남은 길이 가늠해보면 사는 일 요절복통은 어디가고 없습니다. 220410

삼월

. 삼월 * 봄은 오래 거부해온 病과 함께 필요했던 휴식과 함께 강제로 온다. * 아내의 코로나가 천천히 떠나간다. 절연을 잇기 위해 사과를 보냈다. 고맙다는 말이 돌아왔다. * 그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존중하기로 한다. 내가 맞지만 그들도 맞다 * 새벽 세시에 깼다. 목마름이 아니라 어떤 불안이 나를 깨웠다. 지고 있었고 슬픈 잠을 다시 잘 수밖에 없었다. 종일 숙취 핑계를 대고 고개를 주억댔다. * 곧 죽을 목숨이 곁에 있다. 종일 지금 죽여버릴까 생각한다. * 월 이백여 만원을 지불하고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매주 시립도서관을 다니기로 한다. * 시간은 앞쪽이 뾰족하기도 하고 뒷쪽이 뾰족하기도 한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시간 밖에 있을 수밖에 없다. 불안하게..

이월

. 이월 * 설날. 나 외의 가족은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 객기도 수명이 다한 듯 한 번 폭주에 사흘이 무너졌다 * 모이면 싸운다 흩어져야 그립다 * 건달이 대통령 될 수도 있는 나라 우리나라 웃기는 나라 * 죽은 친구가 생각나는 개 같은 정오와 무력 * 나는 현재와 싸우는 과거 엎지르고 쏟고 깨뜨리고 반성하고 음모를 꾸리는 중이다 * 오지 않은 불행을 예측하는 불행에 관한 진단 불치의 풍토병 * 우습게도 아내의 코로나 검사결과를 기다리며 2월은 잠든다. 음성이면 출근 양성이면 격리 어느 편이든 좋다. 결정이 있으니. 220228

지우개

. 지우개 다 깨진 속에 약을 넣는 일 지워지길 바라면서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일 생각한다 라는 말은 정말 하고싶지 앓은 일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지고 싶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게 한다 지워지는 것은 생각을 이기는 일 더 센 약을 넣은 이는 이미 지워져 분노한다 지워진 사람의 분노는 갈피가 없다 눈을 감고 싸우는 사람을 보며 지워지지 못하는 일은 깨진 것들이 모조리 일어서는 일 모두 지워진 속에서 혼자 지워지고 싶은 일은 지워지지 않는 일 깜깜하게 지워진 것들을 바라보며 지워지지 못하는 일 하지만 언젠가는 지워지는 일 지워지고 나서도 지워지지 않고 바라보는 일 200323

그때 나는 어디 있었을까

. 그때 나는 어디 있었을까 긴 테이블이 놓인 술집에서 한 남자가 두들겨 맞고 있다 얌전히 앉아 고스란히 얻어 터지고 있다 때리는 남자도 맞는 남자도 한 마디 말이 없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눈두덩이도 시커멓게 멍들었다 밤 아홉시 형광등 불빛은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있다 때리고 맞는 두 사람 주변을 열댓 명의 사내들이 둘러섰다 그들도 아무 말이 없다 팔짱을 낀채 충혈된 눈으로 발길질과 주먹질 그리고 쓰러지고 일어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을뿐 반항도 없고 만류도 없다 때리다 지쳤는지 깡마른 남자가 무릎에 팔을 짚고 그 사이로 고개를 떨군다 맞던 사내는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잠시 모든 것이 멈춘다 그래 더 패라 속으로만 말한다 삼십 분 동안 그는 나를 팼고 양반다..

없는 길을 걷는 일

. 없는 길을 걷는 일 달리면 말러를 듣고 멈추면 이성복을 읽는 일. 컴퓨터를 켜면 먼저 시편을 읽고 갈라디아서를 몇 줄 쓰는 일. 오전에 쉼보르스카 한 편 점심 먹고 김이듬 한 편. 머리가 맑으면 차라투스트라 한 꼭지도 읽는 일. 이틀에 한 번씩 오규원의 교과서를 읽으며 전에 써둔 시 몇 편을 고쳐보는 일. 아무 일 없는 하루를 억지로 반성하는 시조 한 편을 쓰고 누군가의 사진에 홑시조로 댓글을 붙이는 일. 엽서 사이즈의 켄트지에 찔끔찔끔 식구들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친구가 소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아는 체 하는 일. 불의한 일을 성토하는 친구의 글에 좋아요 하거나 공유하는 일. 그럼에도 하루는 늘 느려 맨손체조를 하며 오후를 재촉하는 일. 잠깐 즐겁다 쉬 지치고 내팽개쳤다 금방 또 줏어담는 만 갈래 길..

내가 아직 자라는 이유

. 내가 아직 자라는 이유 정수리는 자꾸 비워지는데 나머지 터럭들은 부지런히 자란다 얼마 전에 깎은 것 같은데 손톱은 또 그새 길게 자랐다 눈썹이 그렇고 발톱도 그렇다 동네에서 제일 키 큰 여자였던 구순 어머니도 이제 쪼그라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 더 이상 자라기는 커녕 줄어드는데 굳이 극성스럽게 자라는 것들은 무슨 속셈일까 죽은 뒤에도 손톱과 모발은 잠깐 더 자란다는 말도 들었다 온 몸의 끝에서 자라는 것들 뾰족하게 내밀어 어딘가에 닿고 싶은 것일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쉬 닿지 않는 새끼발가락 굽은 발톱을 깎는다 무릎에 눌린 가슴으로 물어본다 어딜 가느냐고 그만 가라고 끝만 자꾸 나서서 뭘 하겠느냐고 200606

혈거시대

. 혈거시대 몇 평 동굴은 깊다 부숴진 문을 당기면 삭아 문드러진 시간들이 흘러나온다 꺾여진 신발 두 켤레 아무렇게나 놓여있고 인기척은 없다 문간에 사내 하나 잠들어 있다 사지가 익사체처럼 퉁퉁 불었다 반쯤 떨어진 퇴적이 덜렁거리는 암갈색 벽을 돌아가면 사라져가는 원형도 하나 누웠다 도무지 오지 않는 기척으로만 얼씬대는 어느 때 떠지지 않는 눈으로 짐작만 할 뿐 해야할 일은 없다 이 굴혈에서 가뿐 숨을 내쉬면 어둠이 조금씩 새어나와 구석이 점점 더 깊어지는 곳으로 발을 딛는다 검은 박쥐 한 마리 어깨를 치며 달아나고 잠시 멈춘다 다시 가라앉는 어둠속 저 곳 오도가도 못하는 나의 폐사지 있다 촛불 하나 켜지 못하고 그저 널부러져 멸망을 기원하는 어둠 하나 고스란히 누워 우는 듯 웃는 듯 나를 보고 있다 2..

몽상 210428

. 몽상 210428 다 이유가 있겠지만 번개탄 세 장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수면제 대여섯 알 주머니에 챙기고 마지막 한 잔 가방에 넣고 어디서 결행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반지하 제 집에서 떠난 이 빼곤 대부분 중고차 안 아니면 어디 여관방 차 안은 좁아 무릎이 아플 것 같고 제 살던 방은 쳐다보는 것들 너무 서러우니 조금은 멀어져 누군가 머물다간 흔적 덕지덕지 앉아 영혼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곳이 좋겠지 떠난 뒤 너무 오래 혼자 있지 않게 적당한 시간에 문을 밀쳐 찾아줄 이 있는 곳 돈은 치렀으니 당당하게 들어 먼저 소맥으로 문을 열고 수면제로 문을 닫고 번개탄 불 붙여 주전자 받침 쟁반에 놓고 마지막 맥주를 마시고 눈 감으면 그러저러 끝날 터 궁리는 늘 비슷한 구석에 모여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유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