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김현<입술을 열면>, 김경애<목포역 블루스>. 그리고 숙제의 간격

취몽인 2019. 10. 8. 10:34







김현<입술을 열면>, 김경애<목포역 블루스>. 그리고 숙제의 간격




  일산 호수공원옆에서 이듬책방을 꾸려가는 김이듬시인이 '목요일에 시와 에세이를 읽는 모임 - 목시에모"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 첫 번째 모임이 9월 20일에 열렸고(나는 못갔다.ㅠㅠ) 다음번 모임은 10월 17일이다. 처음 두 번 모임은 이듬시인이 고른 시집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다음에는 에세이를 그리고 다시 시집을 두 권, 이렇게 진행이 된다고 한다. 목요일은 주중에 내가 쉬는

요일이라 무리를 하면 참석할 수도 있겠지만 쉬는 날 저녁 일곱시에 시흥동에서 일산까지 가서 두 시간 모임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참석은 못하지만 모임 날짜에 맞춰 선정된 책들은 같이 읽는 걸로 함께 하자 마음 먹었다.


 지난 9월 20일 첫 모임의 시집은 김현시인의 <입술을 열면>이었고 다음 주 두번째 책은 김경애시인의 <목포역블루스>이다.

미리 사둔 김현시인의 시집은 회사에서 짬짬이 읽고 있는데 한 달이 다 지났지만 아직도 다 읽지 못햇고, 김경애시인의 시집은

가방에 넣고 다니다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이듬시인이 두 시집에 설정해 둔 토론 주제는 <김현 - 입술을 열면 - 성소수자는 누구

인가?>, <김경애 - 목포역블루스 - 여성으로서 지역(?)에서 시를 쓴다는 것, 영호남은 누가 갈라 놓았던가?>이다. 뒤의 시집의 경우

정해진 주제를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생각을 해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앞의 시집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적어도 시집에 실린 시의 80%를 읽고 발문까지 미리 다 읽은 지금 시점까지는. 왜? 읽긴 했지만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시집은 최근, 아니 내가 오래 동안 힘들어 하는 시 읽기의 두 가지 전형이다. 시인의 측면에서 보면 젊은 시인과 내 또래 장년의

시인으로 나누어지고, 시의 모습으로 보면 역시 젊은 시인들의 실험시 스타일과 나이든 시인들의 서정적 스타일로 나누어진다. 


  김경애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다소 미학적 감동 측면에서 아쉽다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가졌지만 비슷한 세월을 살아온 시인의 정서와

말투는 정겹고 가슴에 와닿는 점이 많았다. 이듬시인이 정해준 주제, '지역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도 어느 정도 와닿았다.

그건 지역이라는 한계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단의 아웃사이더로서 시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시인이나 나나 피차 아직도 제대로된 문학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 그 열패감의 핑계를 소외에 돌리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다. 물론 이 경우는 다분히 내게 더 많이 해당되는 부분일뿐 김경애시인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럴 주제가 못된다.

시집에 대한 두 번째 주제인 영,호남이 나뉜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말하고 싶지 않다. 다 알지 않나? ㅎㅎ


  김현시인의 시들은 그냥 내겐 어렵다. 시의 앞 뒤로 붙인 각주(? 시인은 그것을 디졸브라고 말한다)와 시  자체를 같이 읽어내기도

힘들고 무슨 뜻인지 해독하기도 힘들다. 그저 선배들이 가르쳐준 느낌으로만 낯선 세계의 냄새를 기웃거릴 뿐이다. 형편이 이러니

토론 주제를 언급하는 것조차 어렵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부끄럽지만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주제를 의식하고

굳이 연결해보려고 했을 때 희미한 흔적 정도를 짐작했을 뿐이다. 발문을 쓴 양경언씨의 소개에 따르면 김현 시인의 차별적 특징은

'캠프적 작법'과 각주를 사용하는 기법 등이라고 한다. '캠프(camp)는 미국 작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에 의해 "부자연스러운 것,

인위적이고 과장된 것을 애호하는 양식이란 의미로 정식화된 비평개념'이라고 발문 저자 역시 각주로 소개하고 있다. 이 각주는 나를

다소 위로해준다. 김현의 시는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과장되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것과 과장된 것을 싫어하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시다. 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다. 아니다. 위안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이 시집이 내게 주는 가장 큰 효용은 아직도 너무 

멀리 있는 시의 세계, 예술과 미학의 세계에 대한 열패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멀리 있는 시, 그 거리가 주는 불편함, 그것도 시집이

내게 주는 감정 아니겠는가? 이런 형편이니 9월 20일 목시에모에 갔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 권의 시집은 동병상련과 동상이몽이다. 내게 시는 떨치기 어려운 꿈이지만 언제까지나 가까이 다가서기 힘든 꿈이기도 하다.

욕심을 버리고 그저 지난 세월 그래왔던 것처럼 좋아하고 실망하고 도전하고 공부하고 좌절하며 함께 늙어 갈 길일 뿐이다.  


  이듬시인이 내준 숙제 중 김현편은 불가능하다 이미 말했고, 김경애편은 아래 시 한 편 옮겨 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내 안의 반란 / 김경애



 가시밭 같은 문학판

 얼마나 더 고독하고 침잠해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잇을까?

 변방의 시인이라 속으로 징징거린다

 서울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더 이런 생각이 든다


 십여 년이 넘도록 서울 문인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한 소심한 나,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대상도 없이 혼자 상처받고 우울해진다


 세밑 동향 시인의 시상식 축하를 위해 서울에 갔다

 이제 좀 낯익은 사람이 생겼겠지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서울은 망망한 바다

 나만 외로운 섬처럼 덩그러니 떠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멀어 일찍 일어섰다

 무언지 아쉽고 한 귀퉁이 바람이 불어

 유리컵 한 개를 깨고 왔다

 소심한 나를 대신해 슬쩍 술잔을 밀쳐 버린 코트 자락,

 심술의 흔적을 새기고야 마는 내 안의 반란


 자꾸 침잠하는 소리,

 그래도 마음에 등불을 켠다

 밝은 그늘 속으로 얼비치는 나의 핼쑥한 얼굴

 나는 더 오래 나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