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황인숙

취몽인 2020. 2. 3. 16:10

 

사람은 누구나 슬럼프를 겪는다.

특별히 시인이 슬럼프를 겪는다면 어떤 시가 탄생할까?

황인숙시인의 좀 낯선 시집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간 시인은 비교적 유쾌한 목소리로 슬픔을 노래했었다.

그 맑은 슬픔들은 맑아서 깊은 슬픔으로 다가 왔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그 맑음들을 버렸다. 시집 제목에 나와 있듯이 침울한 슬픔들이 가득하다. 시인 스스로 침울한 슬럼프의 늪속에 빠져 있다고, 그래서 속상하다고 거듭 이야기한다.

 

그전에도 시인은 바닥을 이야기 했었다. 바닥에 엎딘 시인은 웃으며 슬퍼했다. 지금은 바닥에 서서 침울하다. 며칠 전 김언시인의 시론집을 읽다 이런 구절을 보고 메모해 둔 적이 있다.

 

'누군가의 내면에서 가장 못나고 모자라고 극악하기까지 한 그 지점이 한편으로 누군가의 예술 세계를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하고 풍부한 텃밭이다. 결핍으로 충만한 공간, 무언가 모자람이 가득해서 더 돋보이는 바닥.'

 

김언이 말한 바닥과 시인이 서있는 바닥은 물론 다르다. 시인이 전에 섰던 바닥과 지금 선 바닥 또한 다르다. 하지만 그 곳은 바닥이라는 점에서 또 서로 통하기도 한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스스로에게 한바탕 욕설을 쏟은 시인은 이제 무슨 말을 다시 하게 될까? 맑음을 되찾을까? 바닥을 벗어나려 안간 힘을 쓸까? 모든 가능성은 바닥에서 일어난다. 그곳은 예술 세계를 가능케 하는 텃밭이니까. 그리고 바닥 자체도 예술 세계이니까.

 

이 시집은 1998년에 나왔다.

지금 시인은 바닥 위 난간을 고양이들과 함께 가볍게 걷고 있는 걸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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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다

 

 

모든 죽음은 그 장소가 정해져 있어서

모든 아직 산 자들이 그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것을 생각하면

 

아저씨, 이 집은

왜 이렇게 술이 잘 쏟아지는 거예요?

자꾸 술병을 쓰러뜨리며

곤드레가 된 한 사내가

술집을 나와

비틀비틀, 한 발, 한 발,

 

아스팔트로, 골목으로, 구석방으로,

식당으로, 극장으로, 잔칫집으로,

공사장으로, 도서관으로, 산으로, 강으로,

한 발, 한 발, 그 길,

눈길, 빗길, 밤길, 햇빛 화창한 길로

 

어떤 코믹한 죽음도, 실없는 죽음,

개죽음도, 그가 결국 죽으러

그곳으로 다가가는 걸음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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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정류장

 

 

오다가 버스도

어디선가 얼어붙어버렸나보다.

 

하늘은 물 든 지 오래

갯밭빛이다.

노을의 끄트머리가

녹슨 닻처럼 던져져 있다.

 

바람결에 한 고랑에 모인

서로 낯모르는 가랑잎들 바스락거린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몇이

옹송그리고 있다.

 

길 아래 교회 첨탑 위

성탄의 별은 소금빛.

 

살얼음진 바람을 깨뜨리며 한 남자가

저만치 걸어갔다 돌아오고

다시 걸어갔다 돌아오고

점점 더 멀리 걸어나가고

 

발톱이 선 강마른 가랑잎이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굴러간다.

 

가로등이 찬 빛을 뿜으며 맑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