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215

과수원에서 / 마종기

. 과수원에서 . . 마종기 . 시끄럽고 뜨거운 한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즐거움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

저녁의 습격 / 이병률

. 저녁의 습격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만나기로 한 약속 일찍 도착한 나는 서 있기도 무엇해 백화점 안을 둘러보는데 미리 와 있는 나는 혼자 뭔가를 먹고 있습니다 저녁이나 먹자고 한 건데, 뭔가 잘못됐나도 싶지만 어엿한 정각이 되고 나는 모르는 척 백화점 앞에서 나를 만납니다 따뜻한 것이 먹고 싶다며 골목을 돌고 돌아 나를 데리고 찾아간 식당, 당신은 태연하게 백반을 먹기 시작합니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우적우적 가슴 안으로 몰아넣고 있는 저 일은 무슨 일일까 생각합니다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병률 . 2006. 창비 분명 잘..

詩 / 최영미

. 詩 . . .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 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에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 문장으로 똑 떨어져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