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말할 수 없는 애인 / 김이듬

. 저물녘 조언 나는 거지 아니다 교정을 배회하는 프티부르주아 아니다 나는 인간, 아니다 지금은 알고 싶지 않다 가방 하나 칼 한 자루 어제는 인문관 근처에서 오늘은 학군단 컨테이너 뒤에서 쑥을 캤다 때때로 버찌도 따고 모과나무 열매를 향해 돌을 던진다 그러다가 새들을 날려 보낸다 몇 해 전 글 잘 쓰던 소설가가 부임해왔지만 그는 곧 교수 자리에 안착해 소설 따윈 잊어버렸다 백내장으로 눈먼 언어학 교수는 식후에 여학생 둘의 팔짱을 끼고 매일 운동장을 세 바퀴 돈다 나는 내 시를 혐오하는 동료들과 장난을 치고 자기 시간을 빼앗았다고 내게 누명을 씌운 선배 강사와 농담을 한다 나는 일주일에 예닐곱 시간 단순노동을 하고 시간제로 임시직으로 조합도 정년도 없이 살게 될 것이다 제도에 반항하는 척 난 얽매이지 않..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 김민정

. 비 오는 날 뜨거운 장판에 배 지질 때나 하는 생각 하자, 가 아니라 하면 할게, 라는 사람이 무조건 착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우리는 오늘에 이르렀다 사랑은 독한가보다 나란히 턱을 괴고 누워 을 보는 일요일 오후 톰슨가젤의 목덜미를 물고 늘이진 사자처럼 내 위에 올라탄 네가 어떤 여유도 없이 그만 한쪽 다리를 들어 방귀를 뀐다 한때는 깍지를 끼지 못해 안달하던 손이 찰싹 하고 너의 등짝을 때린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즉흥이다 그런대로 네게 뜻이 될 만큼은 내가 자랐다는 얘기다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윗목 소쿠리에 놓여 있던 사과를 깎는다 받아먹는 너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진다 물러 무르면 지는 거라는데 말이지 언젠가 자다 깼을 때 등에 배긴 그 물컹이 갓 낳은 새끼 강아지였다며 너는 이제 와 소용없는 ..

남해 금산 / 이성복

. 강변 바닥에 돋는 풀 강변 바닥에 돋는 풀, 달리는 풀 미끄러지는 풀 사나운 꿈자리가 되고 능선 비탈을 타고 오르는 이름 모를 꽃들 고개 떨구고 힘겨워 조는 날 길가에 채이는 코흘리개 아이들 시름없고 놀이에 겨워 먼 데를 쳐다볼 때 온다, 저기 온다 낡은 가구를 고물상에 넘기고 헐값으로 돌아온 네 엄마 빈 방티에 머리 베고 툇마루에 누우면, 부스럼처럼 피어나는 동네 꽃들 가난의 냄새는 코를 찔렀다 ---------------------------------- 핸드폰 속에 이성복의 시집 10권을 집어 넣었다. 한 권에 80편 정도이니 800편의 시를 휴대하게 됐다. 집에도 몇 권 있을 것이다. 겹칠 수도 있다. 상관없다.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는 것이다. 詩란.. 평생 책 한 권씩을 끼고 살았다.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술에 취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 인연이라는게 있다. 어쩌다보니 이틀 연속 제주도의 시를 담은 시집을 읽는다. 어제는 젊고 맑은 시인을, 오늘은 늙고 푸른 시인을. 이름 없는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 중에 유명한 시집을 꼽으라면 이 '... 성산포'도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벌써 30년 전에 나온 시집이고 시인도 구순을 넘었다. 살면서 몇 번인가 시집 속의 시 한 두 편을 만난 적은 있었지만 이미 읽은 것처럼 느껴지는 처음 읽는 시집이라니. ㅎㅎ 그것이 꼭 제주도여서는 아니라 생각한다. 바다는 어디에서든 그리운..

부끄러움.

식구가 아프면 인간 덜된 나는 짜증이 먼저 난다. 좋게 말해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픈 당사자는 얼마나 섭섭할까? 오래 자주 아픈 식구들, 위로를 먼저 하지 못하는 이 불친절이 싫다. 돌아서서 오래 미안하지말고 처음에 잘하면 되는데 왜 이 모양일까? 늙어가는데 어른이 안된다. 콘이가 아파 온 식구들 말이 없어졌다. ㅠ 200609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김명인

. 간반 채색이 흐린 무늬가 손등으로 번졌지만 아직은 섭생이 내밀할 거라는 착각? 꽃이라 여기지 말자, 목소리도 이젠 탁해질 때가 되었다. 목둘레의 간반이나 볼 언저리 검버섯 어느 날 문득 안 보이던 것들이 보여서 드디어 목적지에 다가섰다는 생각, 오래오래 걸어와 부은 발등에도 그늘은 얹혀 있다, 저승꽃이라 하지 않고 산책길에 덮어쓴 낙엽 같은 것이라고, 문을 여는 손잡이로 맺히는 저 꽃을 우리는 간반이라 한다 악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끝내 쥐여지지 않는 다짐이라면 붙잡은 것들 놓아 보내야 하리 닫히는 꽃이여, 손잡이가 눈앞에 있다 2018년. 문학과지성사

사회학 Socialogy /리처드 오스본

. .또 날아갔다. 블로그 바뀌고나서 몇 번째인지 모른다. 사회학은 사회를 정의하지 못한다. 보들리야르의 하이퍼리얼 사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회는 너무 빨리 변하므로 아무도 현재 사회를 정확히 볼 수없다. 따라서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역사학의 기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회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파워엘리트들의 이해 담론을 지지하고 피지배층의 수긍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능을 부지불식간에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분명 중요한 연구 분석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회학은 아직 여러모로 애매한 곳에 서있다. 한 가지 의미있는 목소리,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부르주아 계급은 힘으로만 지배하는 게 아니라 동의에 의해서도 지배하며, 다른 집단과 정치적인 제휴를 하면서 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르기적 작업을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 ...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하늘에 다녀왔는데 하늘은 하늘에서도 하늘이었어요 마음속에 손을 넣었는데 아무 말도 잡히지 않았어요 먼지도 없었어요 마음이 두 개이고 그것이 짝짝이라면 좋겠어요 그중 덜 상한 마음을 고르게요 덜 상한 걸 고르면 덜 속상할 테니깐요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가로등 불빛 좀 밟다가 왔어요 불빛 아래서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뒤졌는데 단어는 없고 문장은 없고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삶만 있었어요 한 삼 개월 실눈만 뜨고 살 테니 보여주지 못하는 이것 그가 채갔으면 좋겠어요 ------------------------------- 시집 발문을 쓴 이가 시인의 詩를 명도 明度가 높다 말했다. 詩들을 읽는 내내 이 느낌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 ..

현대문학 6월호

소설보다 詩가 많아 좋다. 소설을 읽기 위해서 굳이 정기구독을 하면서 소설이 많으면 불편해 하는 모습이라니. 그래서 억지로 소설을 읽어야 하며 그래서 정기구독을 할 수밖에 없다. 두 번 도전했다 좌절한 '김현'의 詩가 실렸다. 핀 시리즈로. 아마 또 실패할 것이다.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자의 詩가 실렸다. 소설과 평론은 수상자가 없다. 詩가 잘나거나 소설이 못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멀 것이다. 컨템포러리 리터레처니까. 여섯 살 짜리 비인간의 인칭으로 쓰여진 김 솔의 소설을 먼저 읽었다. 먹기 싫은 걸 먼저 먹어치우는 심정으로. 답답하게 읽었다. 역시. 또 한달 동안 불편할 것이다. 컨템포러리 리터레처이므로. 먼 現代이므로, 文學이므로. 정기구독이므로.

불화하는 말들 /이성복

몇 번째 읽는 지도 기억할 수 없지만 다시 읽는다. 그리고 또 메모한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데서, 한 발 더 내밀어야 해요. 그러면 주체와 대상, 이승과 저승이 다 떨어져 나가는 걸 경험할 수 있다고 해요. 우리도 그 언저리까지는 가야 해요.' 나는 아직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 끝까지 밀고 간다는 것. 그게 뭔지 알게될 날이 올까? 그때까지 밀고 나가야 하나? '말이 말을 하게 하라. 말이 번지게 하라. 말을 굴려 말에 실려가는 글쓰기를 하라.' '글 안에 우연과 돌발변수를 집어넣으세요. 말에 실려 가는 모험을 해야 해요.' 말에 실려간다는 것. 그건 조금 알것 같기도 하다. 시작을 하면 그 후에 말에 의해 시가 나가는 경험.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면 한심하니 그게 문제. 어쨌든 살짝 맛이 가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