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아 입이 없는 것들 /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이성복의 시집을 얼추 다 읽었다. 정작 다 읽고 나니 맥이 빠진다. 무환화서 한권 읽은 것 같다. 다시 읽을 일 있을까 싶다. 알 수없는 일이지만.. 마라! 마라! 한다. 시인은... -----------------------------------------------------------------. 내 생애에 복수하는 유일..

공명을 좇아서

비 오는 날 문득 나라는 놈은 솔직히 詩 잘쓰는 게 부러운 것이 아니라 멋진 詩人으로 사는 모습이 부러운 것 아닌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시인들과 어울려 폼나게 사는 詩人의 삶을 살았으면.. 그래서 끝내 변두리를 기웃거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 일 어지간히 추스리고 나면 삼류들 찾아다니며 촌스럽게 나름 폼 잡으며 살자 그러면 되지 않을까? 詩는? 어찌 돼있겠지 뭐.

나는 너다 / 황지우

. .67. "남산 제1호 터널, 붕괴 직전" 이라고 해도 차량들은 여전히, 태연히, 어쩌면 붕괴될지도 모를 개연성이 있는, 남산을 통과할 수 있게 하는 제1호 터널, 그 칙칙하고 컴컴하고 매캐하고 긴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다 뒈져도 나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거야 하는 심정으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건지. 이기심은 얼굴에 철판을 깔게 하고 양심은 가슴에 기부스를 하고 서울 사람들을 세련되게 하는 것은 신경질과 무감각이다. 심장에 맹장염이 걸릴 수도 있다. ------------------------------------------ 황지우시인이 1986년 펴낸 세 번째 시집. '제목을 대신하는 數字는 서로 변별되면서 이어지는 내 마음의 불규칙적인, 자연스러운 흐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한강

. 심장이라는 사물 2 오늘은 목소리를 열지 않았습니다. 벽에 비친 희미한 빛 또는 그림자 그런 무엇이 되었다고 믿어져서요. 죽는다는 건 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일 그게 왜 고통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영혼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고통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 시집 해설을 쓴 이가 시인의 현재를 표현한 글이다. 멘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을 소설가로 데뷔하기 한 해전에 먼저 시인으로 등단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20여권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 한강이 내놓은 첫 시집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의 작품들이 담고 있는 고통받는 육체와 영혼, 그리고 그 이유의 탐색, 극복 등을 표현하는 길잡이로..

겨울밤 0시 5분 / 황동규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 .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혼자 있어서 홀가분한 이 외로움, 외로움 아닌 것은 하나씩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속에 봉해뒀던 사람들은 기색이 안 좋지만 하나씩 말없이 나간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비울 게..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허수경

. 오래지 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난 시인의 詩를 읽는 일은 오래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일 같다. 시시껄렁하게 살다 가고 싶다던 시인은 마음대로 가셨는지? 적어도 그를 보내던 무렵, 내가 봤던 세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차분하고 조용한 신화. 그때 시인을 환송하는 플랫폼에는 그런 현수막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인은 낮게 웃었겠지만. 시인이 살아있을 때 이 시집을 읽었다면 아마 지금 읽은 느낌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30센티에 100년이라는 고고학의 시간, 시인이 걸은 직하의 시간에, 시각에 더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갔고 나는 이제야 읽었으니 내 읽기는 그의 죽음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시는, 예술은 그런 것인지 모른다. 발화되고, 인쇄되고, 배포되면 시인은, 시는 그 ..

삶이라는 직업 / 박정대

. 이 글은 넉 장의 흑백사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수많은 인용과 단상들로 뒤섞일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무시하고 내용은 형식에 의해 집결할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체'라고 명명되고 체의 글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中 ------------------------------------------ 내 두 딸의 고교시절 국어 선생님. 내가 아는 박정대 시인의 직업이다. 선생과 시인. 그나마 투잡으로 잘 어울리는 직업들이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직업이 삶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세상살이의 궁극적인 일이 사는 일이라면 모든 인간의 직업은 삶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달의 이마에는 물결 무늬 자국 /이성복

. 이성복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중간 정산 같은 시집.^^ 시, 뭐 별 거 아니네 싶기도하고 시, 참 오묘하네 싶기도한 시집. 100 편의 시는 모두 이마에 외국시 한 편씩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고 시가 그 외국시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상의 발판이나 그림자가 될뿐. 외국시들은 달이고 이성복의 시는 그 이마에 비친 물결 무늬다. 달은 중요하지 않다. 무늬가 중요하다. 우리는 무늬를 읽는 것이다. 간혹 달이 아니라 별일지라도 그곳에서 역시 물결무늬를 일으킬 것이고 시는 태어날 것이다. 시인은 이 시들을 쓰면서 '왜 시를 쓰는가?' '시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해 삶을 살았던 적이 많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헤겔이 말한 대..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 이대흠

. 거의 동시에 두 권의 시집을 읽었다. 한 권은 박정대시인 다른 한 권은 이 시집이다. 두 시집 모두 땅이름이 많이 나온다. 한 권은 대부분 외국, 주로 유럽과 히말라야의 지명들이고 이 시집은 전라남도 장흥 일대의 땅이름들이다. 기억 속에 선명한 땅이름을 많이 가진 시인들이 부러웠다. 한 사람의 넓은 폭이 부러웠고, 이대흠시인의 깊고 짙은 폭이 부러웠다. 후자가 훨씬 더 부러웠다. 깊은 고향이 있다는 것. 그래서 파내도 파내도 흙냄새와 함께 눈물이, 그리움이, 설핏 웃음이 자꾸 나오는 그 정서의 원형이 부럽다. 시집에 나오는 장흥, 자응. 탐진, 북천은 그 깊은 샘의 다른 이름, 다른 표정, 다른 역사이다. 물론 그 샘에서 뭔가를 길어내는 것은 시인의 역량이겠지만 그 샘 자체의 가치를 무시할 수도 없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