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글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글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프랑스 문화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저서 에서 사진과 관련된 개념으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제시한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공통적으로 느끼는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정보이고, 길들여진 감정이며,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 같이 날아와 박히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데, 유독 나에게만 필(feel)이 꽂히는 그런 느낌..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박영욱

. 데리다와 들뢰즈. 개념이라는 껍질을 깨뜨리고 표상이라는 한계를 지우고자 애썼던 두 사람. 동일성이라는 폭력의 세상에 차연 또는 차이를 통해 자유를 불어넣고자 한 두 사람. 당연하다고 말해지는 것들에 대한 부정, 진부하고 획일화된 감성에 대한 도전과 반성. 즉 고정되고 고착된 의식으로부터 삶의 해방을 모색한 두 사람의 생각들. 차이의 차이, 폴세잔의 '생빅투아르산'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 개념이 파괴돼야 한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도식이 제기되면 이와 더불어 기존의 개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차이는 틀에 박힌 개념이나 표상의 틀에서 깨어날 때 드러난다. 차연(diffrante), 파르마콘, 대리보충에 의한 대리..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이성복의 세번째 시집. 앞의 두편 보다는 그나마 쉽게 읽히는, 다소 감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들이 담긴 시집. 여러 곳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詩들을 읽으며 든 군금 몇 가지. '사랑은 몇 번의 경험만으로도 만 편의 시를..

방부제가 썩는 나라 / 최승호

. 방부제가 썩는 나라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 -------------------------------------- 알라딘을 뒤지다 읽어볼까? 해서 주문해 도착한 시집. 한 이틀 서랍에 뒀다 꺼내 읽으니 안면이 간지럽다. 몇 편 읽으니 안면이 탁 트인다. 작년인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시집이다. 요즘 이런 일이 잦다. 닥치는 대로 읽어 그런가? 책을 가져오는 곳이 많아서 그런가? 책방, 인터넷 서점 두 군데, 도서관 두 군데, 인터넷 도서관까지.. 거기에 낡은 기억력이 더해져 다섯 권 사면 한 권은 읽었고 게다가 이미 집에 있는 책이다. 어쩌겠는가? 좋아 샀으니 두 권 있어도 좋고 두 번 읽으면 더 좋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사실이 또 그렇고. 시인은 여전히 시니컬하다. 답답한..

좋은 지 나쁜 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 이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인의 책을 처음으로 읽어본다. 왜? 그간 막연히 무슨 교주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그냥 그랬다. 명상과 치유 같은 주제의 탓도 있고 무엇보다 시인을 따르는 이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은 탓도 있다. 그게 시인 탓은 아닌데.. 한 때 정호승시인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가진 적이 있었다. 환갑 다됐어도 철들기는 어림없는 노릇이다. 얼마전 시인이 번역한 인디언추장들의 글을 모은 책을 읽으며 생각했었다. 더 늦기 전에 이 사람의 책을 한번 읽어보자. 그러고나서 내 편견을 따져보자. 그래서 전자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다. 제목이 내 심정을 정확히 찌르는 것 같다. 아니 시인이 내게 던지는 항의로 들리기도 한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맞는 말 아닌가? "만약 누군가가 당..

하루키 일상의 여백 / 무라카미 하루키

. 25년 전에 나온 책에 대하여, 지금은 어느듯 70이 된 하루키의 40대 중반 이야기에 대하여 마땅히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미국에 있으면서 마라톤을 하고 재즈를 듣고 고양이를 관찰하는 담백한 전성기 작가의 일상을 내가 읽은 것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여전히 여러 나라를 떠돌며 소설을 쓰고 낯 선 거리를 달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씩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글로 남겼을 것이다. 나 또한 휘청휘청 세월을 살아왔고.. 허적허적 뭔가를 적으며 늙었다. 하루키가 70세라는 사실은 좀 슬프다. 그의 약간 무심한 듯한 말투가 어울리기에는 좀 많은 나이다 싶다. 그저 그의 25년 전과 나의 20년 전을 추억해보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을 조용히 웃으며 나누고 싶을 뿐. 하루키의 건강을 빈다.

책 여행

. 책 여행 2020년의 절반이 지났다. 간당간당한 직장생활은 용케 유지되고 있고 어머니가 부쩍 쇠약해지셨다. 그렇게 세월은 간다. 올해의 책 읽기도 반환점을 돌았다. 년초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에 관한 책을 뒤적인 걸로 시작한 책 읽기는 지금 이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에 머물고 있다. 늘 그렇지만 어떤 주제를 정해 놓고 시작한 독서는 어느 시점인가에서 보면 아주 다른 곳에 와있곤 한다. 애초 생각했던 독서의 줄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오래 공부중인 '詩와 예술'을 기본으로 '과학과 神', 그리고 '녹색경제'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자 마음 먹었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연이어 읽고 시집과 시론들을 꾸준히 읽었다. 슬로우라이프는 법정스님 추천 책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자..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마루야마 겐지

. 책 제목이 사뭇 도발적이다.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세상에 분노를 쏟고 있는 책이다. 세상이라고 하면 너무 무차별적이고, 구체적으로 가족, 국가, 직장, 종교, 사랑 등 사람이 얽혀서 살고 있는 여러 관계들의 부조리나 폭력, 이기심 같은 것들에 대해 속지말고, 당하지말고 인생을 살라 주장한다. 내용은 얕다. 알 법한 이야기들을 언성을 높여서 이야기 하는 정도이다. 어떤 책들은 목차만 읽어보면 대충 이 책이 무슨 말을 하는구나 짐작할 수 있고 실제 목차 이상의 내용이 없는 책도 많다. 이 책도 좀 그렇다. 그저 이 소설가는 왜 이렇게 화를 내며 글을 쓰고 있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독특한 문체인가? ㅎㅎ 표 4에 몇 줄 요약이 있다. 그 여덟 줄을 읽으면 목차를 읽는 것보다 빨리 저자의 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 푸코와 데리다 개요를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른채 읽고 조금 더 정리된 데리다와 들뢰즈를 펼치다 공연히 머리 아픈 짓 하는 것 같아 덮었다. 시적 안목이 일정 부분 철학적 안목에 기댈 수 있다는 기대는 내게 여전히 유효하지만 담을 수 있는 역량이 안된다는.. ㅎㅎ 하루키 매니아인 둘째 책장을 뒤져 하루키 한 권 훔쳐 읽는다. 하루키의 글은 어쩌면 휴식같다. 조용한 골목이나 천변을 휘휘 걷는 느낌. 머리 아플 때 읽으면 편해지곤 한다. 그 점에서 하루키는 훌륭하다. 그 때문에 번번히 노벨상 문턱에서 자빠지는 것일테지만.. ㅎㅎ '무작정 첫 소설을 쓰고나서 별 재미도, 개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 소설을 타자기를 쳐서 영문으로 번역해보면서, 짧은 영어 실력 탓에 최대한 절제된 어휘와 구문으로 정리하면서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