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허수경

. 가기 전에 쓰는 글들 많은 경우, 이미 죽은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 죽음은 오래 전에 떠나 책에는 그림자도 없다. 그저 잘 살아 있었을 때의 뜨겁거나 미지근한 가슴이 적혀 있을뿐. 우리는 그의 흔적을 읽고 느끼거나 놀라거나 가슴을 쓸어내린다. 여기,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 속에서 죽어간 사람이 죽어가면서 쓴 글이 있다. 읽는 나는 아직 식지 않은 그 소문의 안타까움과 함께 이제는 죽은 그의 글들을 읽는다. 시시껄렁하게 살고싶다 했던 그는 시시껄렁하게 죽어가진 못했다. 소문 때문이다. 죽은 허수경의 아직 산 목소리는 내용과 관계없이 우울하다. 220403 쓴다는 일과 생각한다는 일의 先後를 생각하게 된다. 종일 뭔가를 쓴 시인. 종일 뭔가를 생각해서일까? 종일 뭔가를 쓰느라 생각을 한 것일까? 어느 것이..

정오가 온다 / 황규관

. 시집 한 권을 읽으면 시 한편을 독서 후기로 남기곤 한다. 가끔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이 시집이 그렇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세상을 혹독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는 쇳조각들 같다. 자꾸 나를 힐책한다. 그래서 불편하다. 시인은 그러라고 시를 썼을 것이다. 가늠할 수 있는 독서와 사유의 量이 목소리를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닌가? 詩에게서 위로를 우선 구하는 얼치기 독자는 좀 난감하다. 220422

뿔을 적시며 / 이상국

. 이 시인의 詩를 읽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금새 이 시인을, 詩를 좋아하게 됐다. 예술 따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한 소소한 목소리. 곁을 지나는 바람의 표정. 고향과 가까운 사람들의 온기 같은 것들이 시집에 넘친다. 나도 이런 詩를 쓰려고 애쓴다. 예술은 예술가들이 하시고 詩가 꼭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맥 놓은 詩가 예술이 아닐 이유도 사실 없다. 다른 시집도 챙겨볼 것이다. 비슷한 詩도 써볼 것이다. 좋으면 닮을 수도 있지. 뭐 대단한 예술 하는 것도 아닌데.. 220416

시 읽기의 방법 / 유종호

. 시인보다 더 詩에 빌붙어 먹고 사는 사람들 있다. 평론가가 그렇고 창비, 문지, 수많은 문예지.. 詩를 애호하는 딜레땅뜨들이 지불하는 詩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비용을 받아먹고 산다. 그점에서 유종호라는 사람, 범람하는 시인과 시들을 추려 골르고 자신의 몇마디 생각을 더해 많은 책을 펴냈다. 내게도 대여섯권 있다. 좋은 詩를 추천하고 詩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데 보탬을 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비슷한 책을 수십년 동안 내는 모습은 지금 보니 좀 유쾌하지 못하다. 詩에 기대 쌓은 지명도를 우려먹는 이 양반이 정작 詩를 위해 뭘 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돈 버는 거 말고..

봄의 생일

봄의 생일 - 봄의 생일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우리 집 용어를 빌리면 봄 생일이다. 음력 3월 7일. 좋은 봄날에 태어났다. 아내는 생일이 또 한번 있다. 양력 11월 7일. 주민등록상 생일이다. 나와 결혼한 이래 공식적인 생일로 챙기는 날이다. 비정상에는 늘 사연이 있다. 멀쩡히 국립대 상대를 나와 대기업에 턱하니 입사를 한 잘난 아들이 어느날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 맏딸과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경악했다. 그러나 자식을 이길 재주는 없고 결혼을 시킨 후 어머니의 뒤끝은 매섭고 오래 갔다. 나는 9월이 생일이다. 마뜩치 않은 며느리가 아들하고 동갑인 것도 싫은데 생일도 더 빠르다. 마침 그 며느리 주민등록 생일이 11월이다. 앞으로 네 생일은 11월로 해라. 남편 ..

사과

. 안녕을 위해 내키지 않는 사과를 했다. 좋은 분의 불편을 덜어드리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김재덕입니다. 우선 죄송하단 말부터 드립니다. 지난 열흘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지만 저간의 사정과 관계없이 제 표현들이 많이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말투가 있듯 글에도 글의 투가 있을텐데 그 투가 제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발끈했습니다. 그게 국장님 스타일의 유머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입장을 바꿔 국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호의의 표현을 삐딱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의 옹졸함이 막말을 확대 재생산했던 건 부인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 다시 한번 사과 드립니다. 선을 넘으셨다 하셨으니 다시 돌이키기는 쉬지 않겠지만 사과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2021년 10월 ~

. 2021년 10/1 실업자 첫날. 추석이다. 어머니 돌아가신지 일 주일이다. 아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할 일도 없다. 그저 불쑥불쑥 돋는 서러움 같은 것만 목구멍속으로 우겨넣기에 급급하다. 10/2 동생도, 아이들도 다 제 집으로 돌아가고 아내와 둘이 비빔냉면과 갈비탕을 사먹었다. 신호 위반 딱지를 뗐고 낮잠을 자지 않으려 애쓴다. 실업자에게 잠들지 못하는 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아내와 개인택시 차량을 새것으로 살것인지 중고로 살것인지 의논했다. 새차를 사라한다. 평생 한번쯤은 새차를 탈 자격은 있다 말한다. 과연 그런가? 10/5 어머니는 법적으로 세상에서 말소되었다. 주민등록이 지워지고 호적은 여백이 되었다. 어머니 이름으로 진 빚을 갚았다. 어머니 이름으로 된 돈들은 법이 아직 인출을..

화환

. 화환 얼마전 서초동 대검청사앞에 윤석렬총장을 응원하는 화환 수백개가 늘어서 진풍경을 이뤘다는 뉴스를 봤다. 애국자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꽃다발의 장사진을 차렸다니 가히 훌륭한 나라다. 花環. 꽃으로 만든 큰 가락지. 무슨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나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에 가면 들어서는 길목에 죽 늘어선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진심 여부와는 관계없이 당사자의 위세 정도에 따라 헌상하는 이들의 숫자가 결정되고, 따라서 길이나 규모로 세도를 가늠하기도 하는 성공의 척도, 화환. 최근에는 업자들이 네트워크를 이루어 주문은 전국 각지에서 해도 제작과 배달은 도착지와 가장 가까운, 화원도 아닌 조립 공장 같은 곳에서 일괄 제작되다보니 한 곳에 늘어선 화환 수십 개가 다 똑같은 꽃, 똑같은 리본, 똑같은 ..

지난 시간의 메모

. 메모장에 이런 글이 남아있다. 지금 나는 이미 환갑인데. 얼마전 만 58년의 삶을 꽉 채운 생일이 지났다. 우리 나이로 치면 내년이면 예순이 된다. 60세, 상상도 못했던 세상이 내 앞에 오는 것이다. 환갑, 영감, 할배, 뒷방, 퇴물, 은퇴, 뭐 이런 단어가 앞으로 두 달 뒤에 나를 자연스럽게 수식하게 되겠지. 아니다, 나는 아직 아니다 하고 외쳐도, 실제 조금 성급할 지라도 장강의 뒷물은 어쩔 수없이 나를 떠밀 것이다.

물과 꿈 / 바슐라르

. 바슐라르 다시 읽기 두번째, 물과 꿈. 그렇지 않아도 읽어내기 쉽지 않은 바슐라르를 40년전 번역된 책으로 읽는 건 고통스러웠다. 몇번이고 최근에 이학사에서 새로 번역되어 나온 책으로 갈아타고 싶었으나 '불의 정신분석'을 읽은 탄력으로 버티며 읽었다. 결론은 다른 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자는 다짐이 되었지만, 그 또한 비교치가 필요하므로 참고 읽은 건 잘했다 싶다. 철들기 전부터 나는 잠드는 일이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일이었다. 이부자리에 모로 누워 미지의 바다로 출렁이며 나서는 동안 스르르 잠들곤 했던 일은 불과 10년전까지도 이어졌으니 내 꿈은 바다 한가운데서 꾸어졌다고 해도 될 것이다. 바다, 그리고 물. 인간의 근원적인 출발점 또는 안식처의 이미지. 부드럽게 흐르고 모든 것을 감싸지만 스스로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