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물과 꿈 - 바슐라르

. 물과 꿈 '불의 정신분석'에 이어 '물과 꿈'을 읽는다. 시인이 생산한 시는 그 자신 속에 깊게 자리한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바슐라르의 생각. 그 무의식의 뿌리는 크게 불, 물, 흙, 공기의 네가지 원소로 대별할 수 있다는 어쩌면 황당하고 옛 그리스 철학 같은 낡은 생각에서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의 현상학은 출발한다. 그의 이론들은 대체로 외적 형식의 분석에 치우쳤던 문학비평의 방법을 내적, 주관적 물질성 쪽으로 옮겼다는데 큰 의미를 두는 일반적 평가처럼 비평의 방법론으로 가치가 커보인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상상력과 몽상에 기대 시를 생산하고자 하는 시인들에게는 생각만큼 효용이 커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솔직히 다른 시인의 시를 깊이 파헤치는 일이 내 시를 깊이 심는 일과..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

. 액체 근대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그의 생각들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방향을 잡을 수 있을까 해서 먼저 읽은 책. 결론은 실망. 역시 잔재주는 큰 재주의 방해꾼이다. 바우만 사상의 대강을 얻은 대신에 그의 저서들에 대한 껍데기를 먼저 뒤집어 쓴 느낌, 무엇보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쓴 서평이 담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다. 나역시 원칙이라는 고체를 지키지 못하고 은근슬쩍 나를 허무는 편리함과 기능주의, 상품화된 인문학의 액체서에 녹아내렸다는 느낌. 반성이라도 하게 된 걸 다해으로 생각해야 되나?

끝에는

. #끝에는 사진은 이집트 피라미드를 위에서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본 뾰족한 끝은 저렇게 좁지만 평면인 공간으로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왜 끝까지 뾰족한 꼭지점으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혹시 꼭대기에 오를 사람을 위한 건 아닐까요?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올 신의 자리일까요? 출근은 했지만 아무 일도 못하고 앉아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벨라차오가 흐르네요. 사지로 떠나는 파르티잔의 노래. 우크라이나 생각도 나고 선거판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 생각도 납니다. 절대 상상도 하기 싫은 무뢰한, 무뇌인의 당선 가능성이 불쑥불쑥 불안을 일으킵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집채만한 큰 돌을 옮겨 피라미드를 쌓은 건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유와 정의를 쟁취한건 아내의 눈물을 뒤로 하고 집을 떠난 파르티잔의 행동이..

언덕 꼭대기에서 소리치지 말라

. #굿모닝詩한편 . . 언덕 꼭대기에서 소리치지 말라 . . 저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물론 당신이 하는 말은 옳다, 너무 옳아서 그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소음이다. 언덕 속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당신의 대장간을 지으라. 그곳에 풀무를 세우고 그곳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가 그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 노래를 듣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 -올라브 H.하우게 ----------------------------------- 동지에게 외치는 건 잠시 멈추자. 주저하는 이웃에게 가서 망치질하고 노래하자. 그 노래를 듣고 그는 바르게 갈 길을 정할 수 있다. 지금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오시라. 페이스북 바깥으로 나가시라.

역사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역사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 일곱 개의 성문을 가진 테베를 누가 건설했는가? 책에는 왕의 이름들만 적혀 있다. 왕들이 울퉁불퉁한 돌 덩어리를 직접 날랐는가? 그리고 수없이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는가? 황금으로 빛나는 리마의 건설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는가? 만리장성이 완성된 날 저녁 석공들은 어디로 갔는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승리의 개선문들로 가득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는가? 끝없이 칭송되는 비잔티움제국에는 궁전들만 있었는가?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곳을 집어삼키는 밤에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어 가면서 그들의 노예를 애타게 불렀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을 물리쳤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은 데려가..

사라짐의 기술 /나오미 쉬하브 나이

. 사라짐의 기술 . . 사람들이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하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라. 사람들이 파티에 초대하면 대답하기 전에 무슨 파티인지 잊지 말라. 그곳에서 누군가는 너에게 자신이 한때 시를 썼노라고 큰 소리로 말할 것이다. 종이 접시에 기름투성이 소시지를 들고서. 그것을 떠올린 다음에 대답하라. 사람들이 '우리 만나야 한다'고 말하면 '왜?'라고 반문하라.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소중한 어떤 것을 기억하려는 것일 뿐이다. 나무들과 해 질 녘 사원의 종소리를. 그들에게 말하라. 새로운 계획이 있다고. 그 일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군가가 식료품 가게에서 너를 알아보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양배추가 되라. 십 년 동안 소식 없던 누군가가 문..

즐거운 시간

. #즐거운시간 왠만해선 일요일에 약속을 하지 얗는다. 일주일에 하루 아내가 있는 집에서 뒹구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저녁 약속이 생겼다. 거절할 염치가 없어서.. 늘 그렇듯 약속장소에 50분 정도 일찍 도착하서 근처 커피숍을 찾아 혼자 커피 마시며 쪼끄마한 문고판 책을 읽는다. 평생 차 없이 외출할 땐 책 한 권을 들고 다녔다. 손에 들고 다니는게 귀찮아 주머니에 집어넣기 좋은 문고판을 가지고다닌다. 오늘은 언저 샀는지,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없는 범우문고 릴케를 들고 나욌다. 마지막까지 이태준의 무서록과 경합했다. 몇 쪽이나 읽을지, 언제 다시 읽을지는 알수없다. 220227

빈집 / 김사인

빈집 김사인 문 앞에서 그대를 부르네. 떨리는 목소리로 그대 이름 부르네. 나 혼자의 귀에는 너무 큰 소리 대답은 없지 물론. 닫힌 문을 걷어차네. 대답 없자 비로소 큰 소리로 욕하네 개년이라고. 빈집일 때만 나는 마음껏 오지. 차가운 문에 기대앉아 느끼지. 계단을 오르는 그대 발소리 열쇠를 찾는 그대 손가락 손잡이를 비트는 손등의 흉터 문 안으로 빨려드는 그대의 몸, 잠시 부푸는 별꽃무늬 플레어스커트 부드러운 종아리 닫힌 문틈으로 희미한 소리들 새어나오지. 남아 떠도는 냄새를 긴 혀로 핥네. 그대 디딘 계단을 어루만지네. 그대 뒷굽에 눌린 듯 손끝이 아프지만 견딜 수 있지 이 몸무게 그리고 둥근 엉덩이 손이 떨리네 빈집 앞에서.

목숨

. 목숨 겨우내 사무실은 추웠다. 낮에는 난방기와 난로를 켜고 지냈고 저녁에는 따뜻한 집으로 퇴근했다. 난방이 꺼진 빈 사무실은 밤새 더욱 추웠을 것이다. 그 싸늘하고 어두운 곳에서 몇 그루 식물은 대책없이 떨었을 터 주인이 돌아와 온기를 켜줄 아침을 기다리며. 겨울은 조금씩 끝이 보이는데 황금죽은 허리가 시들어가고 금전수는 여기저기 잎이 얼었다. 저 친구들이 다시 살 수 있을까? 잎을 만져보면 싸늘한데. 빈 응접실에 난방을 최대한 틀고 더운 바람이 쏟아지는 길목에 세워놓았다. 언 손 녹이고 조금만 더 견뎌달라 부탁한다. 지금만 지나면, 내년 겨울엔 꼭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겠다 약속한다. 부디 죽지마라. 목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