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백무산

. . 도마 엄연히 현실에 동원돼 있으나 정체는 바닥과 한 몸이라 드러나지 않는다 파먹히고 난자당하지만 입이 없다 역할은 분명하지만 진술이 없다 자르는 쪽도 잘리는 쪽도 아니다 때리는 쪽도 짓이겨지는 쪽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둘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둘 사이 행위를 모두 받아안는다 핏물이 튀고 살이 발라진 다음에 목적을 떠난 잉여의 힘을 덥석 문다 튕겨나가는 여분의 흉기를 경계 안쪽으로 끌어안는다 가축의 범위를 정하고 법이 정한 도살과 착취의 면허를 부여하고 핏물을 뒤집어쓰고 칼집으로 날을 저지하는 곳에 야생의 누출을 저지하는 광란에 윤곽을 부여하는 파멸 직전 무고한 죽음의 희생제의가 치러지고 그리하여 겨우 세계가 유지되는 그 바닥에 정체가 명명되지 않기에 허용되는 아래쪽에 수많은 칼집을 받아안아..

재봉질하는 봄 / 구봉완

재봉질하는 봄 .................. 구봉완 염소를 매어놓은 줄을 보다가 땅의 이면에 음메에 소리로 박혀 있는 재봉선을 따라가면 염소 매어놓은 자리처럼 허름한 시절 작업복 교련복 누비며 연습하던 가사실습이 꾸리 속에서 들들들 나오고 있네 비에 젖어 뜯어지던 옷처럼, 산과 들 그 허문 곳을 풀과 꽃들이 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상처 하나 없는 예쁜 염소 한 마리 말뚝에 매여 있었네, 검은 색 재봉틀 아래 깡총거리며 뛰놀던 새끼 염소가, 한 조각 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하네 구멍난 속주머니 꺼내 보이던 언덕길 너머 보리 이랑을 따라 흔드는 아지랑이 너머 예쁜 허리 잡고 돌리던 봄날이었네 쑥내음처럼 머뭇머뭇 언니들은 거친 들판을 바라보던 어미를 두고 브라더미싱을 돌리고 있었네,..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손택수

. . 이해인 수녀님의 동백가지 꺾는 소리 어떤 꽃가지들은 부러질 때 속 시원하게 부러진다 가지를 꺾는 손이 미안하지 않게 미련을 두지 않고 한번에 절명한다 꺾는 손이나 꺾이는 가지나 고통을 가능한 한 가장 적게 받도록 아니, 기왕에 작심을 하였으면 부러지는 소리가 개운한 음악소리를 닮을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는 급소를 내어준다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도원 65년부터 여기에 있었다고 얼마 전 영정사진을 찍어놓았다고 암투병 중인 수녀님이 선물로 동백가지를 끊는다 뚝,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치 오랜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번에 가지 꺾이는 소리, 세상 뜰 때 내 마지막 한마디도 저와 같았으면 비록 두려움에 떨다가도 어느 순간 지는 것도 보람인 양 가장 크고 부드러운 손아귀 속에서 뚝, 꽃보다 진한 가지 ..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 토드 부크홀츠

. . 오래전에 공부한 경제학개론, 다 까먹어 다시 깨우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 아담스미스, 맬서스, 리카르도, 마샬, 케인즈, 프리드먼.. 경제학을 경제학이게 만든 스타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경제이론을 비교적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대세의 자리를 놓지않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주장에 약간 더 기울어져 있기는 하지만.. 늘 생각하는 바이지만, 대학시절 전공 공부가 지금처럼 관심있는 분야의 책을 읽는 일처럼 즐거웠다면 나는 아마 대학교수가 됐을 것이다.

독거 /이문재

. 독거(獨居) 강 건너가 건너온다. 누가 끌배를 끌고 있다. 물안개의 끝이 물을 떠난다. 봄이 봄의 안쪽으로 들어선다. 나무 타는 단내가 봄빛 속으로 스며든다. 내륙이 온통 환해지고 있다. 황급히 속옷을 챙겨 입던 간밤 꿈이 생생하다. 내가 홀로 서지 못히니 내가 이렇게 홀로 있는 것이다. 냉이 씻어 고추장에 버무린다. 물길 따라 달려가던 능선들이 문득 눈을 맞추며 멈춰 선 곳 바람결에 아라리를 배우는 곳이다. 끌배가 끊어진 길을 싣고 있다. 강의 이쪽을 끌며 건너오고 있다. 외로울 때면 양치질을 했다는 젊은 스님이 생각났다.

지금 여기가 맨 앞 / 이문재

. . 독거(獨居) 강 건너가 건너온다. 누가 끌배를 끌고 있다. 물안개의 끝이 물을 떠난다. 봄이 봄의 안쪽으로 들어선다. 나무 타는 단내가 봄빛 속으로 스며든다. 내륙이 온통 환해지고 있다. 황급히 속옷을 챙겨 입던 간밤 꿈이 생생하다. 내가 홀로 서지 못히니 내가 이렇게 홀로 있는 것이다. 냉이 씻어 고추장에 버무린다. 물길 따라 달려가던 능선들이 문득 눈을 맞추며 멈춰 선 곳 바람결에 아라리를 배우는 곳이다. 끌배가 끊어진 길을 싣고 있다. 강의 이쪽을 끌며 건너오고 있다. 외로울 때면 양치질을 했다는 젊은 스님이 생각났다. - 이문재 2014. 문학동네 * 빈 집 아침, 마음이 빈 강가를 조용히 흐른다. 詩 한 편의 힘이다. #詩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이문재

앵무새의 혀 / 김현 엮음

. . 현대사 연구 2 - 어떤 대화 선생님, 저는 81학번이에요 선생님 시대의 희생타지요 우리는 자율성을 알지 못하거든요 학생 운동은 쭈쭈바이구요 어른들은 그늘에 앉아 땀 식히며 쭈쭈바 빨지요 거대한 공백기 80년대는 공백기 아닌가요, 왜 대형 사건들은 비석만 세우고 지식인 사회는 이빨만 쑤시죠? 칠십년대는 다른 시대였어요 길가는 사람들을 꿈틀이게 했구요 잠자는 사람들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며 일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푸른 못 하나씩 자라나게 했지요 가슴에 못 하나씩 자라나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비틀거렸지요 아, 나도 푸른 못 하나로 비틀거렸다가 행선지 밖으로 밀려나버렸죠 그러나 팔십년대는 달라요 아 다르지요 우리는 지금 줄 안에 있거든요 다만 줄 안에서 춤을 추지요 비틀거려서도 뾰족해서도 안 돼요 줄..

두고 온 시 / 고은

. . 사과꽃 있어야 할 날들이었다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고 이 누리 앞과 뒤 그렇게 있어야 할 날들이었다 한밤중 주린 배로 가는 길 꺼져가는 불빛 하나씩 나눠 가졌다 무엇이고 살아남은 자의 것이었다 가책도 죽은 자에 대한 기억도 개 같은 의무들도 전체도 개인도 그 다음은 똑같이 지옥의 길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있어야 할 날들이었다 긴 밤 지나 대낮은 얼마나 허망한가 사과밭이다 사과꽃이 피었다 참으로 먼데까지 왔다 9만 마리 10만 마리 되새떼가 커다란 벙어리 덩어리로 날아올라 무수한 이단으로 뒤집혀 회오리쳤다 그러자마자 지난날 항쟁의 밤같이 박수소리가 살아났다 온통 하얗다 진리 이후에는 다른 진리가 있다 사과꽃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라 천년의 관습 천년의 확신 천년 이상의 지루한 시간이 네 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