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셰이머스 히니

. .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한 해가 지나갈 때까지 아마는 도심지의 한복판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잔디판에 짓눌린 채 둔중한 초록색 아마는 서서히 썩어들고 있었다. 날마다 아마는 죄를 벌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숨이 막혔다. 거품이 가볍게 일어나고 국화들이 아마 냄새에다 음향의 파장을 강하게 흔들었다. 잠자리들도 있었고, 얼룩무늬 나비들도 있었지만 시선을 잡아 당기는 것은 둑의 그늘진 곳에 고인 물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두터운 개구리알이었다. 이곳에서 봄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젤리처럼 부드러운 개구리알을 병에 가득 채우고 학교의 선반과 집 창틀에 올려 두고 관찰했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 박형준

.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 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맟춰 피멍울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

불황의 경제학 / 폴 크루그만

. . 작은 딸 책꽂이에서 경제학 책 몇 권 꺼내 읽는다. 나도 명색이 경제학사지만 개념도 용어도 희미해져 감각 회복 차원에서 조금씩 읽어볼 생각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폐해는 생각 이상으로 깊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극심하게 훼손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악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극복의 과정에 내가 힘을 보탤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악을 고발하는 詩를 쓰는 정도. 그리고 작은 경제, 자족의 경제, 녹색경제의 확산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조금이나마 실천을 해보는 정도. 우선 눈에 띄는 대로 크루그만의 책을 먼저 읽는다. 금융과 거시경제, 글로벌 제국주의 자본에 휘둘리는 시스템. 그리고 그로인해 고통받는 가난한 나라 개인을 느끼고..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 이문재

. .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구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유산

. 유산 실업급여의 시간이 지나고 내년 삼월쯤 개인택시를 하겠노라, 그걸 내 마지막 직업으로 삼겠노라 마음 먹고 있었다. 개인택시 면허 조건이 내년 1월부터 완화 적용되므로 단기적으로 면허가격이 오를 것이다. 현재 8천만원 정도인 시세가 1억 가까이 오를 전망이다. 1억. 큰 돈이다. 어떻게든 대출을 끌어서 마련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시면서 그 돈을 내게 남기셨다. 물론 집에 묻혀있는 돈이고 혼자인 동생을 위해 더 많이 줘야하지만 개인택시 면허만큼은 내 몫으로 돌아왔다. 1974년, 아버지가 대구 두류산밑에 지은 우리 식구들의 첫 집. 그 집이 고덕을 거쳐 상계동까지 왔다가 내 노후 삶의 밑천이 된다. 그렇게 내 부모는 끝까지 나를 챙겼건만 나는 그분들에게 뭘했는지.. 어머니 장례..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 신대철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신대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러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빝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숴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로 피라미는 거슬러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 쪽에 모여 있습니다.

일본 하이쿠 선집 /오석륜 역

. . 공부삼아 가끔 홑시조를 쓰는 내 입장에서 하이쿠는 참고할만 한 쟝르이다. 마음은 그랬지만 통 읽지 못했는데 어쩌다 이 책을 손에 넣게 되어 읽었다. 일본의 대표적 하이쿠시인 5인의 작품을 실은 選集인데, 기대했던 만큼의 통찰을 느끼진 못했다. 아마 번역의 한계이리라 생각한다. 원어로 읽어야만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5. 7. 5의 짧은 문장에 우주를 담는 일을 어찌 제 말 아닌 다른 말이 옮길 수 있겠는가. 모든 詩는 번역을 거치는 동안 말라죽고 마는 게 정상이리라.

집행유예의 시간

. . 집행유예의 시간 9/1 오후 1시. 한 달의 시간. 권고사직에 따른 1개월 유급휴가의 첫날. 미리 세워둔 시간 계획표에 따라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 마음이 거부하는 운동, 몸을 끌고 겨우 하는 척만. 김종철선생의 책 60쪽, 아폴리네르의 두 편을 황현산선생을 따라 읽었다. 詩의 길을 조금 배운듯. 순서를 바꿔 오후에 볼 영화를 오전에 미리 봤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그래비티. 라면에 밥 말아먹고, 세탁기 빨래 돌려 널고. 동생 생일. 손 다친 어머니 안부전화. 온 식구가 아프다. 하루도 아프단 소리 안 듣는 날이 없다. 마음이 아프다. 일 주일은 이렇게 은둔하기로.. 페북도 안본다. 9/2 오전 11시. 책을 읽고. 내 글의 방향성에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곧 그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회의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