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건욱에게

. 형이다. 여러모로 고생 많았다. 엄마는 늘 바라시던 고통없는 천국으로 가셨다고 우리도 믿자. 그저 자네나 나나 살아 생전 호강 못시켜드린 건 우리 사는 동안 반성할 일인 것같다. 명절에 보고 이야기 하겠지만 네 형수나 조카들 앞에서 뒷 수습 이야기를 길게 하는게 싫어 내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서 말한다. 엄마는 살아 생전 늘 네 걱정이었다. 그래서 상계동 아파트를 네 삶의 기반으로 물려주고 싶다 하셨다. 기본적으로 형도 생각은 엄마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내 형편이 썩 좋지는 않아 네게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게 있다. 처음에는 아파트를 팔아서 최우선적으로 네가 살 원룸 오피스텔을 네 명의로 하나 사고 나머지 중에서 내 노후를 위한 개인택시 면허를 하나 사는 정도로 네게 양해를 구할까 했었다. ..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 . 저녁의 습격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만나기로 한 약속 일찍 도착한 나는 서 있기도 무엇해 백화점 안을 둘러보는데 미리 와 있는 나는 혼자 뭔가를 먹고 있습니다 저녁이나 먹자고 한 건데, 뭔가 잘못됐나도 싶지만 어엿한 정각이 되고 나는 모르는 척 백화점 앞에서 나를 만납니다 따뜻한 것이 먹고 싶다며 골목을 돌고 돌아 나를 데리고 찾아간 식당, 당신은 태연하게 백반을 먹기 시작합니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우적우적 가슴 안으로 몰아넣고 있는 저 일은 무슨 일일까 생각합니다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병률 . 2006. 창비 분명..

이슬의 눈 / 마종기

. . 겨울 노래 눈이 오다 그치다 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직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 막이 빈 벌판을 헤매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 서리도 안내렸는데 눈이 보고싶네.^^ 최근에 시인 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집이 새로 나왔다는데, 나는 23년 전 시인을 만나고 있네. 詩의 미덕 중 하나, 흐르는 세월과 관..

남편

, 남편 - 나는 이 나이 되어서 남편을 안 것 같다. 감성적이고 다소 소심해서 이기적이고 남의 편만 드는사람. 사소한 말이 없어 무뚝뚝함에 정 없이 차갑다 생각했다 ᆢ섭섭했다 지금도ᆢ 말보다 글을 좋아하고 시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 반듯하고 정의롭고 따뜻한사람이다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사람 이제 보니 남편은 모든 것을 사랑하고 글ㆍ그림 시를 사랑하는 따뜻한 그런 남편이다 2020. 09 29.

황무지 /T.S.엘리엇

. . T.S.엘리엇의 황무지. 지금껏 이 詩를 몇번이나 읽었을까? 한 열 번 정도? 다시 읽어도 여전히 완전한 감상은 어렵다. 역자인 탁월한 시인 황동규선생의 해설을 봐도 그렇다. 20세기를 대표하는 詩로 평가받고, 모더니즘을 대표하며 어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연 詩라고 말하는 지체 높은 詩.^^ 삼류 독자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다시 읽어 얻은 것도 있다. 지금 읽고 있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언급된 풍요의 신 또는 오월의 제의 같은 부분들이 채용되어 있고, 기독교나 불교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시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전에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다.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엘리엇이나 아폴리네르에서 보듯 방대한 독서의 경험과 그를 통해..

경제 e / EBS 지식채널

. . 이 책 한 권에 앞으로 내가 쓸 詩 100편이 있다. 지금은 TV를 거의 보지 않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 날(그래도 10년 너머 지났다) 교육방송 ,지식채널 e 시리즈를 관심깊게 본 때가 있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이 시대의 부조리를 아마추어적 으로 정리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경제 관련 책을ㅈ검색하다 이 책을 발견했다. 예순 가까운 나이(이 자각은 늘 섬뜩하고 재수없다)에 40년 전에 읽은 조순의 경제학원론을 다시 읽을 수는 없고, 그저 지워진 큰 흐름을 다시 일깨워주고 거기에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소박한 바램을 이 책은 충실히 이루어 줬다. 무엇보다, 영상 프리젠테이션을 목적으로 구성된 텍스트이니만큼 군더더기가 없어 좋다. 적당한 펀집상 여백을 건너뛰며 다큐멘터리를 보듯 읽어..

별밭에서 지상의 詩를 읽다 / 곽재구 엮음

. . 80편 모두 좋은 詩. 그중에 내게 가장 좋은 詩. 한 편은 어려워 두 편. -------------------------- 13평의 두 크기 - 유안진 너무 늦은 축하가 미안해서, 양초와 하이타이 등을 잔뜩 사들고 인사를 갔었지 13평 임대아파트에서 13평 아파트로 이사간 집으로 쉰 셋 나이에 처음 제 집에 살아본 안주인은, 종아리까지 걷어 보이며 불평불만이었지 석달이나 지났어도 부은 것이 안 풀린다고, 괜히 넓은 집을 사서 다리만 아프다고, 청소하기도 힘들다고, 평수는 같아도 크기는 엄청 다르다고 그녀의 그 어불성설의 화법이 이따금씩 내 두통을 쫓아주며 메아리치곤 하지 ------------------------------- 환하면 끝입니다 - 정양주 하늘이 두 뼘쯤 되는 산골짜기 집 마당에 ..

그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 박남준

.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나 오래 침엽의 숲에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감각을 곤두세운 숲의 긴장이 비명을 지르며 전해오고는 했지. 욕망이 다한 폐허를 택해 숲의 입구에 무릎 꿇고 엎드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한 때 나의 유년을 비상했던 새는 아직 멀리 묻어둘 수 없어서 가슴 어디께의 빈 무덤으로 잊지 않았는데 숲을 헤매는 동안 지상의 슬픈 언어들과 함께 잔인한 비밀은 늘어만 갔지. 우울한 시간시 일상을 차지했고 빛으로 나아갔던 옛날을 스스로 가두었으므로 이끼들은, 숨어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포자의 눈물 같은 습막을 두르고 숲의 어둠을 떠다니고 있다. ----------------------------------------------- '적막'의 시인 박남준. 그..

촛대

. 촛대 돌아가신 어머니 집에서 촛대 하나를 가져왔다. 쇠로 만들어 은색 도금을 한 묵직한 촛대다. 정확치는 않지만 우리 집안에서 제일 오래된 물건일 것이다. 아마 오십 년은 족히 되지 않았나싶다. 한참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철공소에서 오래 일했다. 큰아버지가 철공소를 운영해 일가를 이루셨고 아버지도 그 곳에서 일을 하셨다. 기능공은 아니지만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로 한 몫을 하셨다. 촛대는 그 시절 아버지가 공장에서 직접 만드신 물건이다.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촛대 외에도 부엌의 부삽이나 연탄불 뚜껑 같은 것들도 만들어 썼던 것 같은데 소용이 다해 모두 없어지고 그나마 최근까지 쓸모가 있었던 촛대만 남은 것이다. 어머니 방 냉장고 위에 언제나 놓여있던 빈 촛대. 길고 하얀 양초를 꽂고 심지에 불을 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