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과수원에서 / 마종기

. 과수원에서 . . 마종기 . 시끄럽고 뜨거운 한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즐거움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

아배 생각 / 안상학

. . 안동 숙맥 박종규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보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 시인 새 시집이 얼마 전에 ..

저녁의 습격 / 이병률

. 저녁의 습격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만나기로 한 약속 일찍 도착한 나는 서 있기도 무엇해 백화점 안을 둘러보는데 미리 와 있는 나는 혼자 뭔가를 먹고 있습니다 저녁이나 먹자고 한 건데, 뭔가 잘못됐나도 싶지만 어엿한 정각이 되고 나는 모르는 척 백화점 앞에서 나를 만납니다 따뜻한 것이 먹고 싶다며 골목을 돌고 돌아 나를 데리고 찾아간 식당, 당신은 태연하게 백반을 먹기 시작합니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우적우적 가슴 안으로 몰아넣고 있는 저 일은 무슨 일일까 생각합니다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병률 . 2006. 창비 분명 잘..

파란만장한 우리집 #팝콘 이야기.

. 파란만장한 우리집 #팝콘 이야기. 7년전, 키우던 두 곳의 집에서 파양된 팝콘이 우리 집에 왔습니다. 처음 집에 왔을 때 분리불안이 심하고 자꾸 자기 꼬리를 물어 늘 피를 흘리곤 하는 조그만 강아지는 우리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했었지요 아픈 곳도 많아 온 지 일년만에 양쪽 다리 슬개골 수술, 대퇴골 수술, 자궁적출수술을 했지요. 그리고 제 스스로 물어 뜯은 꼬리가 결국 괴사지경이 돼서 꼬리 절반을 자르는 단미 수술까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심신의 안정을 되찾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번엔 자꾸 통증이 오는 지 비명이 잦아 병원에 갔더니 후두골 이형성증으로 인해 척수에 물이 차서 위험하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온 식구가 고민하다가 몇 달 전에 또 수술을 했습니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 요즘은 안 아픈것 같아요..

파란만장한 우리집 #팝콘 이야기.

. 파란만장한 우리집 #팝콘 이야기. 7년전, 키우던 두 곳의 집에서 파양된 팝콘이 우리 집에 왔습니다. 처음 집에 왔을 때 분리불안이 심하고 자꾸 자기 꼬리를 물어 늘 피를 흘리곤 하는 조그만 강아지는 우리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했었지요 아픈 곳도 많아 온 지 일년만에 양쪽 다리 슬개골 수술, 대퇴골 수술, 자궁적출수술을 했지요. 그리고 제 스스로 물어 뜯은 꼬리가 결국 괴사지경이 돼서 꼬리 절반을 자르는 단미 수술까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심신의 안정을 되찾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번엔 자꾸 통증이 오는 지 비명이 잦아 병원에 갔더니 후두골 이형성증으로 인해 척수에 물이 차서 위험하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온 식구가 고민하다가 몇 달 전에 또 수술을 했습니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 요즘은 안 아픈것 같아요..

너와집 한 채 /김명인

. 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 안도현 엮음

. 20년 전에 안도현시인이 엮은 책. 이 책을 언젠가 도서관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알라딘을 뒤지다 생각이 나서 내지가 누렇게 바랜 헌책을 다시 사서 읽었다. 당시 시인이 '젊은 시인들'이라 불렀던 장석남, 유하, 함민복, 나희덕 같은 시인들은 이제 환갑 근처에 서성이고 있다. 안목이 일천한 나 같은 얼치기는 고운 詩를 골라 떠먹여주는 이런 시집이 좋다. 한 치의 수고도 없이 호사를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시인이 고른 72 편의 詩 중에서 한 편을 굳이 골랐다. 내가 어디로 끌리는지 나중에 확인해볼 요량으로.. ----------------------------- 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

詩 / 최영미

. 詩 . . .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 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에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 문장으로 똑 떨어져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