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에세이 95

나무

. #나무 #메타세콰이어를 보는 일은 늘 상쾌하다. 일렬로 장대하게 늘어선 숲이나 가로를 볼 때도 좋지만 오늘처럼 어느 동네 어귀 어린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호위하듯 서있는 한 그루를 보는 일도 즐겁다. 겨우 무릎께에 얼쩡대는 단풍나무를 지나 하늘로 치솟은 메타세콰이어. 높이를 버티기 위해 밑동의 몸피는 한껏 부풀어 밀려난 껍질이 새의 깃털처럼 덮혔다. 조금 전에 읽은 메리올리버의 글처럼, 나무는 오늘도 이 자리에 서서 가지를 하늘로 뻗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슬쩍 미소짓기도 할 것이며 혹시라도 이 키 작은 남자가 재잘거리고 노는 아이들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할지도 모른다. 하늘이 잔뜩 흐리니 곧 비가 오겠군. 미리 물관을 열어 목마른 우듬지들에게 ..

오래된 책

. 오래된 책 서재를 꾸미면서 적지 않은 책들을 버렸지만 내 서가에는 여전히 오래된 책들이 제법 많이 꽂혀있다. 서머셋모음의 이 단편집도 오래된 보잘것 없는 책 중 하나다. 1997년 청목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문고판이다.활판인쇄본으로 글씨도 작고 무엇보다 언제 내 손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내 손을 떠났는지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위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거무티티하다. 작년 말부터 단편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시와 인문서에 편중된 독서로 서사에 대한 감각이나 감동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책장을 뒤져 레이먼드커버 같은 비교적 최근 작가들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재미가 새삼 쏠쏠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책을 읽는다. 이 책, 서머셋모음의 단편집도 그 중 하나다. 대충 1920년 경..

부작용

. 부작용 작년에 회사 짤리고 집에 틀어박힌지 어느듯 7개월이 지났다. 집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열흘에 한 번꼴로 가까운 친구와 당구치고 소주 한 잔씩 하는 일로 외출을 하고 보통은 오후에 강아지 산책시키러 나가는 외엔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일이 전부다. 물론 갑갑증이 임계치에 다다를 때 몇 번 짧게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집안 대소사로 볼 일을 봐야할 때도 있긴 했다. 슬슬 계획하고 있는 밥벌이 준비를 시작할 때가 되어 이것저것 챙기다보니 어느새 틀어박힌 생활에 익숙해진 나를 발견한다. 오늘 나보다 앞서 일을 시작한 이를 만나 조언을 구할 약속이 잡혔는데 막상 나가려니 가슴이 답답하다. 어려운 사이도 아닌데 그간의 안부 같은 인사치레나 의례적으로 나눌 대화 같은 것들에 미리 질리는 느낌..

미나리

. #미나리 청도가 고향인 친구덕에 매년 이맘때면 #한재미나리 맛을 본다. 어제 오후 불쑥 '미나리 먹자' 연락이 와 단골식당에서 삼겹살과 함께 먹었다. 아삭과 향기는 여전하더군.^^ 예년 같으면 안양 여러분들과 함께 왁자하게 회포를 풀었겠지만 집합금지의 시절이라 셋이서 단촐하게. 이 글 보고 서운해 할 분들 계실텐데.. 형편 이해해주시길... 먹고 남은 한 단은내가 들고 왔다. 둘은 홀애비니 뭐.. 처치가 만만찮을 터. 요걸로 저녁에 뭘해먹을까? 미나리 대패삽겹살말이 구이를 할까? 새파란 전을 부칠까? 돌돌 말이 강회를 할까? 그냥 무쳐 먹으까? ㅎㅎ 고맙네, 친구^^

삼월

. . 삼월 1979년 삼월이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던 때. 긴 반항을 그치고 조금 제 정신을 차렸을 때, 내 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나를 발견했다. 다시 돌아가려고 애썼지만 참 힘들었던 그때. 결국 중간쯤에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지금 여기에 섰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그게 내 인생이니 그러려니 한다. 길은 아직도 내 앞에 여러갈래로 펼쳐져 있으니 끝은 알 수 없다. 2021년 삼월, 오래 만져온 시집 원고 마무리가 거의 끝나가고 실업도 끝나간다. 그리고 둘째는 먼 섬에서 날아갈 준비중이다. 예쁘게. 210327

밀면과 수육 한 점

. 밀면과 수육 한 점 어제 이빨 본 뜨러 범계에 갔다가 볕이 좋아 친구와 밀면 생각이 났다. 전화를 걸어 친구를 부르고 좀 일찍 도착해서 아트센터 앞마당에서 한참 봄꽃과 햇살 맞이를 했다. 마춤하게 도착한 친구와 먼저 당구 한 게임 치고 오니 길게 줄섰던 밀면집 점심 손님들이 한바탕 빠져나갔다. 밀면 먹어본 지가 한 오 년 정도 된 것 같았다. 회포도 풀겸 과감하게 물밀면 곱배기를 시켰다. 그새 미안한 인사와 함께 밀면 값이 천 원 올랐다. 당구를 내가 이겨 밀면 값을 치를 친구에게 살짝 미안했다. 그래봤자 그것도 천 원이지만.. 한참 기다려 나온 밀면은 시원 푸짐했다. 삶은 계란 밑에 돼지고기 수육 두 점. 빨간 양념과 살얼음 속에 탱탱한 밀면 가닥들. 식초를 조금 치고 잘 섞다 수육을 집었다. 난 ..

선산

. #신념 사진 둘. 첫번째 사진은 중학교 1학년때 두번째 사진은 아마 국민학교 입학 전. 한 번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큰아버지, 아버지, 사촌들과 함께 찍은 참 오래된 사진들이다. 그래. 나도 선산이 있다. 김해 김씨 삼현파 자남세가 자손이다. 저 곳 화원 마비정 산자락에는 내 중시조부터 사진 속 큰아버지까지 잠들어 계신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없다. 세상 떠난 부모 형제, 그리고 조상들이 잠든 저 산에 같이 있지 못하고 삼십분 떨어진 낯선 교회 묘지에 홀로 계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는 크리스찬. 큰 집은 아니다. 큰집의 안위를 위해 다른 신을 섬기는 가족은 선산에 들지 말았음 좋겠다는 어떤 분의 신념(?)이 있었다. 그러고 40년. 그 사이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하..

이사와 독립, 그리고 다음

. #이사와 독립, 그리고 다음 33년만에 내 방이 생겼다. 결혼 후 아내와 단칸방을 함께 써왔고 집을 넓혀도 자라는 아이들 방 한 칸씩 마련해주느라 내 방은 따로 없었다. 제일 큰 방에 침대와 책상을 나란히 두고 살았다. 이제 아이들이 다 독립하고 지들 짐들을 정리하면서 어제 방 하나를 비워 내 방으로 삼았다. 책상을 옮기고, 베란다 구석으로 쫒겨나있던 책들을 다시 불러들일 책장을 주문했다. 휴일 종일 이 방 저 방 가구를 옮기고 바리고 하느라 아내도 나도 몸살이 났지만 미뤄둔 일을 마치고 나니 속은 시원하다. 옮긴 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니 강아지가 '너 왜 거기 있어?' 하는 눈치로 어리둥절하다. 이 봄 우리 가족에겐 이사가 많다. 어제 내가 방 옮기는 이사를 했고, 다음 주말은 돌아가신 양친이 이사..

바람과 바다

바람과 바다 26년 전이면 황동규시인의 전성기였을까? 한 50대 중 후반 무렵쯤 될까? 시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서전도 아니고 엄격한 자작시 해설도 아닌 책 한 권. 그저 쉬지 않고 시를 써온 한 인간의 '시 세계 염탐기'라는 책. 기쁜 마음으로 존경하는 시인의 세계를 나도 기웃거려 봤다. 시집 뒤의 발문이나 해설이 시나 시인의 고유성을 해칠 수 있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는 생각이다. 그와는 달리 시인이 자기 시를 되짚어 이야기를 하는 모습도 그리 대단히 유익한 일을 아닌 듯 싶다. 내가 좋아했던 시들의 뼈다귀나 속살을 읽고 보니 그 시들이 좀 구차해보이기도 한다. 그저 시인의 창작 행적이나 더듬어보는 수확 말고는 일지 말 걸 하는 생각도 든다. 그와 별개로 다시 읽은 풍장..

여행

. 여행 겨우내 갇혀 있기도 했고, 마침 처리할 일도 있어 내일 남쪽으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올라오는 봄들 거슬러가서 비린 것들에 소주도 한 잔 하고 남해바다 아침에 잠깨고 돌아올 요량이다. 예전 같으면 차 몰고 혼자 흥얼흥얼 다녀왔을테지만 친구와 같이 가기로 했다. 자주 떠나지도 못하지만 어쩌다 가는 여행도 이젠 혼자가 좀 버겁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몇 가지를 꼽아보면, 제일 먼저 혼술이 편치 않다. 빈 포구 선술집이면 모르겠는데 왁자한 다찌집 귀퉁이에 한상 걸지게 차려놓고 혼자 찌그러져 있는 모습은 어찌 좀 한심할 듯. 현지 친구를 만날 수도 있지만 멀리서 온 사람이라 대접하려는 마음이 번거롭다. 대접 받으러 가는 여행은 별로다. 내 마음이 주인이고 싶은데 예의는 제가 주인 노릇하기 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