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에세이 95

삼월

. 삼월 창밖 호암은 응달에 그제 내린 늦눈을 아직 간직하고 있지만 그 주변 마른 가지들은 아마 몸이 달아있을 것입니다. 삼월이니까요. 남쪽에는 벌써 핀 꽃들 이야기가 들리고 처녀 아이들 미뤄둔 결혼 준비 소식도 자주 들립니다. 삼월이니까요. 이 들썩들썩한 삼월을 맞으며 저도 이런저런 준비들을 하고 있습니다. 범띠니까 우리 나이로 예순. 내년이 환갑인데 뭐 별 의미는 없지만 괜히 몇 가지 매듭 짓는 일들에 손을 대게 됩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 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철든 이후로 평생 제일 오래 무소속 룸펜 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벌어둔 돈도 없고 아직 씀씀이는 크게 줄지 않았으니 한 십년은 더 돈벌이를 해야 합니다. 어디 써주는 데는 없고 공력을 들이는 글쓰기는 재주가 하찮으니 취미 수준을..

철에게

. 철에게 못가봐서 미안하고 제대로 인사 못해 미안하지만 마음은 많이 축하하네. 부글부글 끓기만 했던 우리 시절은 이렇게 기쁘게 가네. 우리 아이들이 만들 빛나는 세상. 그걸 바라보는게 이제 우리의 삶이겠지. 그래도 남은 미련이 자네나 내겐 있으니 마저 쓰고 사세. 잠깐 자네에게 서운한(?) 마음 있었네. 순전히 내 에고로. 이해 하시고 가까운 시간에 소주 한 잔으로 터세.^^ . 축하하네. 늘 고마운 내 친구여. 210301

나머지 이별 준비

. 나머지 이별 준비 연휴니까.. 시간을 맞춰 가족들 함께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벌써 5개월이 지났네요. 그야말로 남는 건 지난 시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방 한뼘 크기의 아파트 같은 봉안당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고 남은 식구들도 아무 말 없이 한참 올려보다 왔습니다.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싶었습니다. 나와 동생, 내 딸들의 근원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한 줌 기억으로만 남은 어머니. 요 며칠 꿈에 자주 나타나셨습니다. 맏이의 궁리를 알아채신 탓이라 생각하는데 가타부타 말씀은 않으시고 그저 생전처럼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습니다. 곧 봄이 오면 먼 곳에 오래 혼자 누워 계신 아버지 산소를 활짝 열어 뜨겁게 화장하고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바다에 뿌려드릴 생각을 하고..

失語

失語 아침에 페북을 보다 페친인 신휘시인이 쓴 글 중에서 "고기도 항거씩 사놓고"라는 문장을 봤다. "항거씩",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표준말로 말하자면 "가득", "충분히" 정도의 의미인 "항거씩". 내 입으로 이말을 뱉어본 적이 언제인가? 대구를 떠나와 서울에 주저 앉은 지 올해로 37년째. 어설픈 기억으로 서울 와서는 한 번도 입에 담아보지 못한 말이다. 어릴 적 소쿠리에 고구마 항거씩 담아 온 식구가 종일 먹던 일이나 명절전 날 튀밥 항거씩 튀겨 들고 오던 일처럼 항거씩은 이제 내겐 점점 멀어지는 고향의 냄새와 더불어 화석이 되고 있는 말이다. 막 서울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1985년, 매 주마다 대구로 내려갔었다. 맨질맨질한 서울말 속에서 모서리를 깎아가며 말을 하다 서대구터미널에서 고..

썩지 않은 뿌리

. 썩지 않는 뿌리 1980년. 고 3 시절. 한 학년 900명이 다닌 학교엔 권력이 몇 있었다. 1. 전교 20등 이상의 우등생 2. 야구부, 테니스부, 펜싱부 등 운동부 녀석들 3. 대체로 800등 이하에 속했던, 노는 녀석들 1번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학교가 지켜줬다. 2번도 건드리지 못했다. 3번과 상당 부분 중첩됐다. 3번은 나머지 그룹 위에 군림했다. 1번은 주로 판사 검사 의사가 됐고 2번 중 몇은 프로나 국대가 됐다. 3번은 나머지와 함께 중구난방이 됐다. 부자도 됐고 찌질이도 됐다. 요즘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는 놈들은 다 1, 2번들이다. 소위 엘리트들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특별 대우를 받던 놈들. 그놈들 중 상당수는 자기들 외의 사람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

. #꿈 밤새(?) 오래된 꿈을 꾸었습니다. 제대로된 광고쟁이를 그만둔 지 10년도 더 됐는데 무슨 건설회사 아파트 분양광고 경쟁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밤새 했습니다. 삼백 페이지 광고 기획서를 썼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따라서 전전긍긍 했습니다. 그 옛날 후배 하나 곁에서 덩달아 불안했습니다. 새벽녘에야 어찌어찌 마무리를 한 것 같은데(꿈속에서..ㅎㅎ) 그래도 불안했습니다. 그 시절 그랬습니다. 늘 마지막까지 초조하다 똥싼 바지 끌어올리듯 덮었습니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자책했지만 더 열심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거리만큼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세월 많이 지나도 마음은 불만이 많은가 봅니다. 한 반 년에 한번씩 이런 꿈을 꿉니다. 내 반 평생을 의탁했던 광고. 그 모질고 모자랐던 시간들이 불쑥불쑥 ..

내 몫의 행복

. #내 몫의 행복 시간이 많으니 하는 일은 역시 책 읽기가 제일 많다. 손 닿는 여기저기에 이런저런 책을 두고 하루에 많게는 열 권 정도의 책을 찔끔찔끔 읽는다. 나름 계획을 세워 시간표에 따라 읽지만 별 의미 없다 싶으면 한 권을 집중적으로 읽기도 한다. 짬뽕식(?) 책 읽기는 가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가령 최승자의 처절한 시를 읽고 바로 문태준의 시를 읽으면 문태준의 잔잔한 삽작에 죽음의 기운이 기웃거리는 걸 느낀다. 시집 두 권의 기운이 뒤섞이는 탓이다. 파울첼란을 읽다 휘트먼을 읽어도 그렇다. 그래서 가능하면 시집은 바로 이어서 읽지 않으려 한다. 성경, 외국시, 한국시, 단편소설, 시론, 공정 경제, 신화, 사회 폭력, 슬로우라이프, 기타 관심사, 먹고 사는데 필요한 책, 그리고 좀 집중해..

느닷없음에 대하여

. . 느닷없음에 대하여 묵상 후 연필부터 뾰족하게 깍고 하루를 시작한다. 날카로운 연필심은 詩 몇 편 위에 무뎌질 것이다. 한번도 못봤지만 가깝게 느꼈던 한 사람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느닷없는 이별이 잦다 그 느닷없음 어쩌면 항상 곁에 있는지 모른다 연필이 하루하루 짧아지듯 한걸음씩 다가오는 느닷없음 아침이 왔으니 저녁도 오기 마련이지만 뒤돌아볼 틈도 없이 누군가 사라지는 일은 황망하다 오후엔 미뤄뒀던 치과엘 가야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니 계단을 걸어서 갈 때 가더라도 밥은 먹어야 하니 몇 달치 수입을 끌어당겨서 이빨을 고칠 생각이다 본전 생각이 간절하면 느닷없는 놈도 형편을 좀 헤아리겠지 하면서 210114

공동번역

. #공동번역 성경통독 올해 성경 읽기는 공동번역본 + NIV로. 갓피아 일년 통독 프로그램 따라 신구약 통독. 별도로 신약 통독 병행. 공동번역본 통독은 처음인데 카톨릭식 지명과 인명이 다소 낯설지만 친절한 문체의 번역이 좋다. 신교 구교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神은 그저 있을뿐인데 누대에 걸쳐 인간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느라 왜곡하고 나누었을뿐. 제법 오래전 우리나라 신.구 교계가 화합과 회복을 위해 성경 공동번역이란 아름다운 프로젝트를 완성했음에도 그 결실을 함께 완성시키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공동번역 성경. 한 해 동안 그 원래 마음을 생각하며 읽어보기로 한다. 21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