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삼월

. 삼월 창밖 호암은 응달에 그제 내린 늦눈을 아직 간직하고 있지만 그 주변 마른 가지들은 아마 몸이 달아있을 것입니다. 삼월이니까요. 남쪽에는 벌써 핀 꽃들 이야기가 들리고 처녀 아이들 미뤄둔 결혼 준비 소식도 자주 들립니다. 삼월이니까요. 이 들썩들썩한 삼월을 맞으며 저도 이런저런 준비들을 하고 있습니다. 범띠니까 우리 나이로 예순. 내년이 환갑인데 뭐 별 의미는 없지만 괜히 몇 가지 매듭 짓는 일들에 손을 대게 됩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 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철든 이후로 평생 제일 오래 무소속 룸펜 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벌어둔 돈도 없고 아직 씀씀이는 크게 줄지 않았으니 한 십년은 더 돈벌이를 해야 합니다. 어디 써주는 데는 없고 공력을 들이는 글쓰기는 재주가 하찮으니 취미 수준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박찬국

. . K mook 두번째 강좌는 '니체' 페친인 안모선생, 황모시인이 자주 인용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나도 읽기는 했다. 어려웠다. 읽었다 말하기 어렵다. 마침 K mook 에서 서울대 박찬국교수의 강좌가 열려 다시 따라 읽어볼까 한다. 머리가 시원찮으면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니체도 그리 생각하리라 믿는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 열린 창(窓) 어느 날 아침 이층으로 올라가 열린 창가에 서서 면도를 하였다. 면도기에 스위치를 넣었다. 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가르릉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포효소리가 되었다. 헬리콥터 소리가 되었다. 한 목소리가, 조종사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소리쳤다. '눈감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보시는 겁니다.' 일어났다. 여름 위로 낮게 비행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조그마한 것들, 그들은 무게가 있을까? 수도 없는 초록의 방언들. 특히나 목재 가옥의 붉은 벽들. 풍뎅이들이 햇빛 속, 거름 속을 번쩍이고 있었다. 뿌리째 뽑힌 지하실들이 공중을 항해하였다. 움직이는 공장들. 인쇄소가 기어왔다. 그 순간 사람들만이 동작 없는 유일한 물체였다. 사람들은 침묵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

철에게

. 철에게 못가봐서 미안하고 제대로 인사 못해 미안하지만 마음은 많이 축하하네. 부글부글 끓기만 했던 우리 시절은 이렇게 기쁘게 가네. 우리 아이들이 만들 빛나는 세상. 그걸 바라보는게 이제 우리의 삶이겠지. 그래도 남은 미련이 자네나 내겐 있으니 마저 쓰고 사세. 잠깐 자네에게 서운한(?) 마음 있었네. 순전히 내 에고로. 이해 하시고 가까운 시간에 소주 한 잔으로 터세.^^ . 축하하네. 늘 고마운 내 친구여. 210301

나머지 이별 준비

. 나머지 이별 준비 연휴니까.. 시간을 맞춰 가족들 함께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벌써 5개월이 지났네요. 그야말로 남는 건 지난 시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방 한뼘 크기의 아파트 같은 봉안당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고 남은 식구들도 아무 말 없이 한참 올려보다 왔습니다.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싶었습니다. 나와 동생, 내 딸들의 근원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한 줌 기억으로만 남은 어머니. 요 며칠 꿈에 자주 나타나셨습니다. 맏이의 궁리를 알아채신 탓이라 생각하는데 가타부타 말씀은 않으시고 그저 생전처럼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습니다. 곧 봄이 오면 먼 곳에 오래 혼자 누워 계신 아버지 산소를 활짝 열어 뜨겁게 화장하고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바다에 뿌려드릴 생각을 하고..

失語

失語 아침에 페북을 보다 페친인 신휘시인이 쓴 글 중에서 "고기도 항거씩 사놓고"라는 문장을 봤다. "항거씩",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표준말로 말하자면 "가득", "충분히" 정도의 의미인 "항거씩". 내 입으로 이말을 뱉어본 적이 언제인가? 대구를 떠나와 서울에 주저 앉은 지 올해로 37년째. 어설픈 기억으로 서울 와서는 한 번도 입에 담아보지 못한 말이다. 어릴 적 소쿠리에 고구마 항거씩 담아 온 식구가 종일 먹던 일이나 명절전 날 튀밥 항거씩 튀겨 들고 오던 일처럼 항거씩은 이제 내겐 점점 멀어지는 고향의 냄새와 더불어 화석이 되고 있는 말이다. 막 서울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1985년, 매 주마다 대구로 내려갔었다. 맨질맨질한 서울말 속에서 모서리를 깎아가며 말을 하다 서대구터미널에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