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詩가 태어나는 자리 / 황동규

. 풍장16 어젯밤에는 흐르는 별을 세 채나 만났다. 서로 다른 하늘에서 세 편의 생이 시작되다가 확 타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오늘 오후 만조 때는 좁은 포구에 봄물이 밀어오고 죽었던 나무토막들이 되살아나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허리께 해파리를 띠로 두른 놈도 있었다. 맥을 놓고 있는 사이 밤비 뿌리는 소리가 왜 이리 편안한가? -황동규. 문학동네. 1994. --------------------------------------------------- 26년 전이면 황동규시인의 전성기였을까? 한 50대 중 후반 무렵쯤 될까? 시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서전도 아니고 엄격한 자작시 해설도 아닌 책 한 권. 그저 쉬지 않고 시를 써온 한 인간의 '시 세계 염탐기'라는 책. 기쁜 마음으로 존경하는 시인의 ..

서정시가 있는 21세기 문학강의실

. .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면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이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 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기차를 놓치다 / 손세실리아

. . 합장 合葬 얼갈이 배추 석 단을 다듬고 나니 버려지는 겉잎만 한 무더기다 흙 헤집고 버둥거리다 등뼈 휘고 기운 소진한 떡잎의 최후가 날짜 지난 신문지 활자 위에 수북하다 패이고 깎여 벌겋게 덧난 놈의 이마를 가만 짚어본다 첫 마음은 순정해서 깨지기 쉬운 거라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은 외로운 거라고 위로하는데 생애 처음 마음에 사람 하나 품고 휘청대던 기억 아직 또렷하다 버려진 것들을 쓸어모아 꽃 진 모과나무 둘레에 구덩이 얕게 파고 묻는다 꼬 깨지고 귓불 떨어져나간 초록 깃발의 꿈을 한데 모신다 -손세실리아 . 애지. 2006. ------------------------------------------------------ 첫 시집을 낼 무렵 시인은 호수가에 살았나 보다. 그 일산 호..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 신경림 엮음

. . 긴 봄날 / 허영자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 죄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 숨어 사는 섧은 정부情婦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쳐다본다 긴 봄날엔..... ------------------------------------ 신경림 시인이 묶은 한국 현대시 100편. 처음 읽는 시가 몇 편인지 세어본다. 문득 든 생각. 나는 왜 신경림시인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동국대 영문과를 나오고 동국대 석좌교수를 하신 분인데.. 마냥 시인이 소백산과 남한강 어드메쯤에서 농사나 짓고 살며 시를 썼으리라 생각했을까? '새재'나 '농무' 같은 시집들 때문일까? 그 속에 담긴 농투성이 무지랭이들을 시인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철..

썩지 않은 뿌리

. 썩지 않는 뿌리 1980년. 고 3 시절. 한 학년 900명이 다닌 학교엔 권력이 몇 있었다. 1. 전교 20등 이상의 우등생 2. 야구부, 테니스부, 펜싱부 등 운동부 녀석들 3. 대체로 800등 이하에 속했던, 노는 녀석들 1번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학교가 지켜줬다. 2번도 건드리지 못했다. 3번과 상당 부분 중첩됐다. 3번은 나머지 그룹 위에 군림했다. 1번은 주로 판사 검사 의사가 됐고 2번 중 몇은 프로나 국대가 됐다. 3번은 나머지와 함께 중구난방이 됐다. 부자도 됐고 찌질이도 됐다. 요즘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는 놈들은 다 1, 2번들이다. 소위 엘리트들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특별 대우를 받던 놈들. 그놈들 중 상당수는 자기들 외의 사람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

. #꿈 밤새(?) 오래된 꿈을 꾸었습니다. 제대로된 광고쟁이를 그만둔 지 10년도 더 됐는데 무슨 건설회사 아파트 분양광고 경쟁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밤새 했습니다. 삼백 페이지 광고 기획서를 썼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따라서 전전긍긍 했습니다. 그 옛날 후배 하나 곁에서 덩달아 불안했습니다. 새벽녘에야 어찌어찌 마무리를 한 것 같은데(꿈속에서..ㅎㅎ) 그래도 불안했습니다. 그 시절 그랬습니다. 늘 마지막까지 초조하다 똥싼 바지 끌어올리듯 덮었습니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자책했지만 더 열심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거리만큼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세월 많이 지나도 마음은 불만이 많은가 봅니다. 한 반 년에 한번씩 이런 꿈을 꿉니다. 내 반 평생을 의탁했던 광고. 그 모질고 모자랐던 시간들이 불쑥불쑥 ..

와온바다 /곽재구

. .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은 당신에게도 절대 비밀이에요 아름다움을 찾아 먼 여행 떠나겠다는 첫 고백만을 생각하고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때 나는 조용히 웃을 거에요 알지 못해요 당신은 아직 내가 첫여름의 개울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방울과 함께 웃고 있을 때에도 감물 먹인 가을옷 한벌뿐으로 눈 쌓인 산언덕 넘어갈 때도 당신은 내 마음의 갈 곳을 알지 못해요 그래요 당신에게 내마음은 끝내 비밀이에요 흘러가버린 물살만큼이나 금세 눈 속에 묻힌 발자국만큼이나 흔적 없이 지나가는 내 마음은 그냥 당신은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곽재구 창비시선346. 2012 --------------------------------------------------- 몇 년 전부터 꽃 이..

어떻게든 이별 / 류근

. . 지금 아픈 사람 네게로 쏟아지는 햇빛 두어 평 태양의 어느 한 주소에 너를 위해 불 밝힌 자리가 있다는 것 처음부터 오직 너만을 위해 아침 꽃 찬찬히 둘러 본 뒤 있는 힘껏 달려온 빛의 힘살들이 있다는 것 오직 너만을 위해 처음부터 준비된 기도가 있다는 것 너를 위해 왔다가 그냥 기꺼이 죽어주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러니 너도 그 햇빛 남김없이 더불어 다 흐느껴 살다 가기를 이승에서 너의 일이란 그저 그 기도를 살아내는 일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햇빛처럼 남김없이 피어나 세상의 한두 평 기슭에 두 손 내미는 일 착하게 어루만지는 일 더불어 따뜻해지는 일 네가 가진 빛의 순수와 열망을 베푸는 일 스스로 용서하는 일 나, 라고 처음으로 불러주는 일 세상에 너만 남겨져 혼자서 아프라고 햇빛 비추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