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내 무덤, 푸르고 / 최승자

. 근황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 무거운 죽음 하나를 떠나보내고 읽는 최승자는 유난히 가깝게 느껴진다. 늘 삶 너머의 죽음 속을 헤매고 다니는 시인. 삶이 죽음에 덮여있다 생각할 때 주변에 닥치는 죽음은 오히려 가벼울 것이다. 아직 책을 읽을 수 없다. 쉽게 헤어지리라 여겼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평생은 단 며칠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한참 걸릴 것 같다. 그게 마땅하기..

어머니를 떠나보낸 기록

어머니가 떠나간 얼마간의 기록 2020 8/19 느낌이 좋지 않아 이 기록을 시작한다 낡은 아파트에 혼자 누워 '나는 이렇게 꺼져가는구나.' 하고 있을 어머니. 돌아오는 일요일은 그녀 남편의 37번째 기일. 8/21 한번도 어머니를 사랑한 적 없다. 스스로 기이할 정도로. 그것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어머니의 책임으로부터 비롯됐다. 어머니가 죽으면 나는 울지 않을 것이고 비로소 한 자유를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비정한 일이지만 오래 된 일이기도 하다. 08/23 아버지 기일. 목이 아프다. 그럴 리 없지만 혹시 코로나면? 노인에게 옮기면 치명. 싸간 반찬 내려놓고 예배 대신 기도만 잠깐 하고 나왔다. 황당한 어머니 모습. 역병보다 자식들 금방 가는게 더 무서운 얼굴. 손녀에게 생전 안하던 말 한다. 난..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셰이머스 허니

. . 예술가 나는 분노에 대한 그의 사고를 사랑한다. 바위에 대한 그의 완고함을 푸른 사과의 본질에 대한 그의 판단을 그는 그 자신이 짖는 모습을 보고 짖어대는 개. 단지 그렇게 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것에 대한 증오 감사나 칭찬을 기대하는 심리의 천박함, 그것은 그에게 도둑질을 의미했다.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의 용기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욕을 먹는 의원처럼, 그의 이마는 사과와 산을 뒤로 하면서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지역을 여행했다. ----------------------‐------------ 이 시집이 언제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속 표지에 내 첫 직장 사수에게 누군가 메모를 남겨둔 걸로 봐서 그는 아마 선물로 이 시집을 받고 다시 내게 주었..

시가 내게로 왔다 2 / 김용택 엮음

. .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 사다놓은 시집을 모두 다 읽었다. 언젠가부터 詩를 공부 삼아 읽었다 싶다. 헛된 일이다. 詩한테 미안한 일이다. 당분간 시집을 사지 않기로 한다. 쟁여놓은 詩만 다시 읽어도 몇 년을 걸릴 일. 이젠 공부하지 말고 다시 감상하기로 한다. 詩는 제가 오고 싶을 때 올 것이다. 좋은 시인이 고른 좋은 詩부터 다시 읽는다. 시집 한 권에 마음 울리는 詩는 겨우 몇 편, 고르는 수고를 고수에게 맡기..

태아의 잠 / 김기택

. . 마장동 도축장에서 아무도 생명과 음식을 구별하지 않는다네 뒤뚱뒤뚱거리던 걸음과 순한 표정들은 게걸스럽던 식욕과 평화스럽던 되새김들은 순서 없이 통과 리어카에 포개져 있네 쓰레기처럼 길가에 엎질러져 쌓여 있네 비명과 발버둥만 제거하면 아무리 큰 힘도 여기서는 바로 음식이 된다네 하루 세 번 양치질하는 이빨들이 씹을 음식이 된다네 해골이 되려고 순대와 족발이 되려고 저것들은 당당하게 자궁을 열고 나왔다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와 생명이 되려고 통닭들은 노른자를 빨아들이며 커간다네 똥오줌 위에 흘린 정액을 밟고 들어가면 슬픈 눈동자들은 곧 음식이 되어 나온다네 - 1991. 문학과 지성. 시인의 최근 시집을 몇 권 읽고 30년전 첫 시집을 찾아 읽었다. 묘사는 현재 시인의 작품들 보다 더 치열하다. 다소..

시가 내게로 왔다 /김용택 엮음

. .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이문재 ---------------------------------- 20년 전에 참 좋아했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책. 시인의 눈에 밟히는 詩는 이제 내 눈에도 비칠 것인가? 기대하며 읽었다. 그간 세월을 공으로만 먹진 않았는지 조금은 염치가 생겼나보다. 詩 한 편 한 편을 넘겨가기가 미안하다. 천천히 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