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498

걸음, 성불하다

걸음, 성불成佛하다 스님이 말했다 나를 유심히 보라고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싣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을 가다듬으며 살펴보라고 그러면 마음이 보일거라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당신의 땅을 딛고 선 지 오십 몇 년 나는 늘 어딘가를 향했다 만고풍상 당신은 천변만변 했으나 나는 그저 늘 한 발을 내딛었을뿐 입이 없으니 입 다물고 눈이 없으니 눈 닫고 귀가 없으니 귀도 닫고 단지 그렇게 발끝만 바라봤어야 했는데 나는 그저 당신만 바라보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당신이 싣고 가는 게 무엇인지 마음을 다해 살펴 보느라 마음을 잃어버렸다 스님 혼자 성불 하시고 200728

염치의 경영학

염치의 경영학 시집 한 권 묶어 세상에 내놓는 일 내 보기엔 참 면구스러운 일인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자랑도 하고 싶을 것 같고 누구 말마따나 좀 팔려서 고마운 출판사 민폐도 좀 덜어주고 싶은 심정도 맞는 것 같은데 먼저 염치가 고개를 드는 건 재주 모자란 나만의 부끄러움일까 그냥 속으로 그러고 말 걸 잘난척 한 마디 던졌다가 혼났다 지도 글쟁이면서 축하는 못할망정 재를 뿌린다고 우르르 욕이 쏟아졌다 부러워서 샘이 나서 그런 거라고도 한다 대놓고 누구한테 말한 적 없고 그 또한 내게 대놓고 말한 적 없지만 혼자서 마음 아파 며칠 책도 덮었다 과연 詩는 부끄러운 스스로가 아닌 것일까? 내놓고 팔기에 염치없는 물건 아닌가? 나만 그런가? 그래서 늘 요자리인가? 200722

답답하세요?

답답하세요? 그냥 들어주면 됩니다 가끔 건성으로 맞장구 쳐주시고 누구 욕하면 슬쩍 편만 들어주세요 절대로 뭘 해결해 주려고는 하지 마세요 해결? 알아서 잘 합니다 잘잘못 따지지 마세요 까딱하면 덤터기 씁니다 답답하다구요? 답답할 필요 없어요 지금 한참 답답을 쏟는 중이니 좀 참으세요 그래도 답답하세요? 그저 좀 들어만 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게 왜 어려워요? 참 답답한 사람일세 이 사람 200616

家訓

가훈 家訓 과부 땡빚 끌어다 낡은 아파트 하나 장만했던 김권사네 애써 수리한 집이 그만 이 년만에 다시 싹 수리해야 할 형편 됐다네 여덟 개 문고리 중 다섯 개가 떨어지고 다섯 개의 LED등 세 개가 나갔다네 싱크대 상판은 금이 가 물이 새고 수도꼭지에서는 분수가 솟는다네 안방 바깥문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서랍장 문은 어허 거꾸로 열린다네 베란다 문틈으로 비가 줄줄 새어들고 방충망은 튿어진 채 일 년째라 일간 들러 손보마 한 지 반 년인데 이젠 전화도 안받는다네 명색이 이십 년 알고 지낸 교회 친군데 저도 권사님 나도 권사님인데 수리하러 온 아저씨가 한 마디 하시네 알뜰히 중국산 썼네요 욕도 못하고 씩씩대는데 그집 막내 김권사 가슴에 쾅 못을 박네 '아부지 이젠 절대로 아는 사람한테 일 맡기지 말자!' 그..

천 년의 거리 한 뼘

천 년의 거리 한 뼘 경주 남산 약사골에 얼굴 없는 부처님 한 분 계십니다. 언제 목이 달아났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리를 지킨 건 천 년이라네요. 얼굴 대신 하늘을 걸고 앉은 부처를 보고 사람들은 어느 허공에 절을 했을까요. 얼마전 비뚜루 선 부처님 바로 세우고 주변을 정리하다 머리를 찾았다네요. '불두는 땅속을 향하고 얼굴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얼굴 오른쪽과 오른쪽 귀 일부에서는 금박도 관찰됐다.' 남산 비바람과 빈 눈초리에 온 몸 닳은 부처님은 아직도 생기 발랄한 당신 얼굴을 만나 얼마나 어색하셨을까요? 그래도 좋으셨을까요? 얼굴이 더 좋아했을까요? 몸이 더 좋아했을까요? 몸에서 떨어져 십 미터. 땅에서 떨어져 오십 센티. 천 년의 거리치곤 너무 가깝지 않나요? 사정 뻔히 알고 있었을 부..

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내 손으로 어금니 하나를 또 뽑았습니다 구석에서 오래 흔들리던 놈 잠깐 아프게 버티더니 뿌리를 놓고 슬그머니 일어서더군요 지난 몇 년 열 몇 개의 이빨이 뽑히고 그 자리에 볼트가 박혔습니다 몇 몇의 나는 가고 녹슬지 않는 타인이 나를 지키는 셈입니다 어쩌다보니 어금니들은 내 손으로 다 뽑았어요 오래 아팠던 것들 진통제로 달래고 기다리다 버티다 제 발로 일어설 때만 헤어졌지요 어쨌든 헤어지면 아픔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지만 더듬어 보면 떠난 자리는 늘 깊더군요 오래 참아 늦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싶습니다 화단 귀퉁이 작약 몇 송이 저뭅니다 꽉 차게 빛나던 붉은 잎은 이즈러지고 발 아래 먼저 떠난 봄들 낭자하네요 다들 그렇게 떠나나 봅니다 제일 단단한 것들을 앞세워..

금천 좌파

금천 좌파 정의가 무엇인지는 한때 달동네였던 아파트 단지 컴컴하게 누르는 저 虎巖도 알것입니다 산복도로로 발치가 다 깎여 나갔어도 눈치는 깊고 가팔라 광화문이고 서초동이고 촛불이 타고 횃불이 타도 옛시절 궁궐 바라보던 시선으로 굳건하게 주저 앉았습니다 그때처럼 가만 있으면 그나마 봐주겠는데 다시 침묵할 수 없다 주둥이질을 산아래로 쏟는 虎巖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형편이 마뜩찮다 나를 모르느냐 옳은 것을 옳다 말은 하지만 절벽 아래 한 걸음도 못 내딛고 산 그림자 속 자꾸 파고드는 메아리로 고함만 지르는 죽은 호랑이 한 마리 虎壓寺에 붙들린 늙은 虎巖 그대여 200530

어스름녘

어스름녘 언제나처럼 서쪽 하늘 아래로 해 저무는데 그 벌건 아쉬움은 꼬박꼬박 뜨겁게 식어가는데 코발트빛 강을 바라보는 오늘은 유난히 나 같아라 종일 길길이 날뛰다가 종내 주저앉아 식어가는 등짝을 느끼는 한 저뭄 같아라 마지막 윤곽으로 빛나는 문을 밀고 먼 지평으로 떠나는 고단한 포기 같아라 밤은 더 짧아져 어스름만 늘어지나니 삶의 고비 넘어 어두워지는 시작 같아라 곧 깜깜해질 문 앞 같아라 200422

선택

선택 작은 어항에서 살던 구피 한 마리 가라앉아 죽고 있었다 지느러미는 벌써 헤어져 먼저 떠나고 물속에서 천천히 죽고 있었다 건져내도 움직이지 않는다 좁쌀같은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볼뿐 곁에 놓인 화분 흙을 들쳐 묻었다 아직 살아있는데 묻어도 되나 마음이 물었다 물속에 살던 녀석 물속에서 천천히 죽는게 나을까 흙속에서 어서 죽는게 나을까 마음은 모르겠다 한다 둘째 발목 수술 하는 날이다 어쨌든 사람은 아프면 고쳐 쓰며 살아가는데 그게 좋은 것일까 구피처럼 할 수 없는 일이지 하며 떠나는게 좋은 일일까 마음이 화분 흙속에서 나오질 않는다 20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