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498

궁리

궁리 . . 회사를 그만두면 한 열흘 어디를 떠돌고싶다 어디를 갈까? 파도 따라 7번 국도를 헤멜까? 종수 만나러 안동 갈까? 찬홍이 보러 구미 갈까? 영진이 만나러 충주호로 갈까? 옛사랑 생각하러 감포를 갈까? 한 번 가겠노라 한 통영 고성을 갈까? 오래 못가본 변산을 갈까? 개심사 들러 욕지도를 갈까? 형님들한테 술 얻어먹으러 제주를 갈까? 해남 땅끝 나무 만나러 갈까? 널부러진 시간 좀 더 써 모조리 다 가볼까? 아내한테 말 꺼냈다 직싸게 욕먹었다 이 시국에 실업자가 유람이 왠 말이냐 한 열흘 남았으니 조금만 더 궁리해보자 이도저도 아니면 아버지 고령 성산 산소나 들렀다가 한 사나흘 이름 모를 저수지에 쳐박혀 붕어나 만나든가 200820

편향

편향 . . 이병일을 보는데 자꾸 신경림이 보고싶다 꾹 참고 또 보는데 또 보고싶다 이병일 덮고 신경림 한 편 봤다 더 보고 싶은데 이병일을 봐야 한다 별 이유는 없다 맨 위에 있었으므로 맨 먼저 보는 것 뿐 세 번째 백무산은 전에 봤다 두 번이나 봤는데 또 보자고 앉았다 누굴 줘버릴까? 이병일을 마저 보기 힘들 것 같다 신경림은 모른 척 하지만 자꾸 눈이 기운다 좋아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병일을 그만 보기로 한다 200819

사계에서

사계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앞 바다가 먼저 푸른 귀를 적십니다 전화 잘 안하는데 그저 통화 한번 하고싶어서요 삼방산이 피식 웃습니다 그곳은 비가 오지 않나요?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막상, 보면 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 걸 그리움이라 말할 수도 있겠죠 동그란 산과 평평한 바다 그 사이 초록색 호를 그리며 앉은 마을 멀리 마라도도 보이고 작은 물결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 사계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에서 그리운 비린내가 나네요 저녁엔 미역국을 끓여야겠습니다 200805

다시 보지 못할 이에게

다시 보지 못할 이에게 - 김상철을 생각함 어제 저녁 같이 당구를 치고 오늘 혼자 떨어져 죽은 친구여 자네에게 인사 가지 않으려 하네 어제 자네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는데 오늘 자네는 웃을 수 없네 아니 나를 볼 수조차 없네 어제 자네는 내 친구였으나 오늘 자네는 모르는 존재가 되고 말았네 없는 자네에게 나는 인사할 수 없네 누군가 말하네 자네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 나 또한 어딘가를 지켜보면 자네와 눈 마주치겠지 별 말은 없겠지 자네 아내와 아이들, 나는 보지 못하네 자네는 없고 슬픔만 남은 그 자리에 갈 수 없네 나 죽거든 자네도 오지 마시게 그때 내가 자네에게 가겠네 만나면 욕 한 번 쏟을테니 빈 악수나 하세 그러니 돌아보지 말고 얼른 가시게 나도 돌아보지 않겠네 200803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지나가지 못한다 이를테면 지금 달리고 있는 자유로 눈 아래 보이는 아스팔트를 밟고 갈뿐 통과할 수는 없고 멀리 보이는 검단산이나 그 아래 아파트 같은 것들 또한 뚫고 갈 수는 없다 그저 비켜 가거나 거슬러 가거나 문을 따고 만들어놓은 통로를 지나갈 수 밖에 없다 너도 마찬가지 내 앞에 보이는 너를 어떻게 통과하겠니 부숴지지 않고 하지만 나는 지금도 통과중이다 검단산과 한강 사이 자유로 위를 통과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을 통과한다 다만 작은 것들 더 작은 것들 오후의 햇살 5G의 전파 막 도착한 미세먼지 개망초의 하잘 것 없는 꽃가루 중앙분리대에 튕겨진 클랙션 소리... 같은 것들로 가득한 눈앞을 헤치며 통과하는 중이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보이는 것들은 나..

갈피

갈피 시집을 읽을 때면 읽다 어떤 詩에 마음이 좋으면 아랫쪽 갈피를 접어둔다 책을 접는게 책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그렇게 마음의 표시를 하는일이 좋다 한번 다 읽고나면 접은 詩들을 다시 한번 읽는다 접은 詩를 다시 펴는 일은 없다 세상일과는 다르게 한번 좋은 詩가 싫어진 일은 잘 없다 나중에 더 나이들어 오래 끼고 다닐 시집 열 권만 고를때 책장의 시집들 뒤집어 제일 많이 접힌 시집 열 권 고르면 되겠다 그러면 접힌 시집한테도 좀 덜 미안하겠지 20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