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정동진역 / 김영남

. 정동진역 . .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김영남 .민음사. 1998 ------------------------------------------..

저녁노을처럼/ 서정주

. #굿모닝詩한편 저녁노을처럼 . . 산 밑에 가면 산골째기는 나보고 푸른 안개가 되야 자최도 없이 스며들어 오라 하고 강가에 가면 흐르는 물은 나보고 왼통 눈물이 되어 살구꽃 잎같이 떨어져 오라 한다 그러나 나는 맨발을 벗고 먼저 이 봄의 풀을 밟겠다 그리고 그다음엔 딴 데로 가겠다 접동새 우는 나룻목에서 호올로 타는 저녁 노을처럼 그다음엔 딴 데로 가겠다 -서정주. 현대시집3. 1950년. ---------------------------------------- 멜랑꼴리한 금요일 아침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이해하느라 기진한 탓인가? 남현동 예술인마을 시장통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미당이 딴 데로 간지도 한참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詩는 이렇게 남아 턱없이 어렸던 술친구를 위로한다..

순간의 꽃 / 고은

. 순간의 꽃 / 고은 * 이 세상이란 여기 나비 노니는데 저기 거미집 있네 * 책을 미워한다 책 읽는 놈들을 미워한다 이런 놈들로 정신이 죽어버렸다 밥그릇들 포개어진 식당같이 빈 돼지우리같이 *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작 속살에 싸락눈 뿌린다 서로 낯설다 -고은 .문학동네. 2001. ------------------------------ 世眼 33년생. 작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와 동갑. 중질도 하고, 민주투쟁도 하고, 문단 상석에서 갑질도 하고, 아니 어쩌면 갑질도 되고.. 한 세상 걸쭉하게 산 사람. 그 걸쭉함 덕에 말도 詩처럼 대우받았을지 모르는 사람. 왠지 불편했던, 그래도 매년 이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노벨상 변죽이 된 사람. 솔직히 글빨은 좋은 사람. 영산강 하구 닳은 물처럼 보여 그간..

퉁 / 송수권

. 퉁* 벌교 참꼬막 집에 갔어요 꼬막 정식을 시켰지요 꼬막회, 꼬막탕, 꼬막구이, 꼬막전 그리고 삶은 꼬막 한 접시가 올라왔어요 남도 시인, 손톱으로 잘도 까먹는데 저는 젓가락으로 공깃돌 놀이하듯 굴리고만 있었지요 제삿날 밤 괴* 꼬막 보듯 하는군! 퉁을 맞았지요 손톱이 없으면 밥 퍼먹는 숟가락 몽댕이를 참꼬막 똥구멍으로 밀어 넣어 확 비틀래요 그래서 저도- 확, 비틀었지요 온 얼굴에 뻘물이 튀더라고요 그쪽 말로 그 맛 한번 숭악하더라고요 비열한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도 남도 시인 - 이 맛을 두고 그늘이 있다다 어쩐다나 그래서 그늘 있는 맛,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삶, 그늘이 있는 사람 그게 진짜 곰삭은 삶이래요 현대시란 책상물림으로 퍼즐게임하는 거 아니래요 그건 고양이가 제삿날 밤 참꼬막을 ..

50대 / 최영미 / 다시 오지 않는 것들

. 50대 헤어진 여인보다 계단이 무서워 2층에서 내려올 때도 엘리베이터? 비 오는 날, 버스에 빈자리가 없으면 예술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아 미술관 다녀온 걸 후회하고 축 늘어진 고기가 되어 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리면, 생이 총체적으로 흔들리지 그때 거절하지 않았다면..... 편안한 의자가 베스트 프렌드보다 간절하고 잇몸이 아프면 살기가 싫어져 - #최영미 .이미출판사. 2019. -------------------------------------- 전쟁을 시작한 시니컬리스트 시인이 전투 중에 펴낸 시집. 적은 막대하여 새 시집 내기도 만만찮았는지 스스로 출판사를 차려 펴낸 시집. 곳곳에 전투의 상처가 묻어 있어 오히려 詩들은 좀 싱거운 시집. 그러거나말거나 성깔 고운 시인도 늙어가고 있고, 더 늙은 영감..

선림원지에 가서 /이상국

. #시한편 禪林院址에 가서 / 이상국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도 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