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공손한 손 / 고영민

. 황홀한 국수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르륵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항셔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강산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고영민 . 창비시선. 2009 ----------------------------------------------- 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일, 그 시간과 입맛 속에도 한 역사 분량의 마음이 ..

긴 호흡 / 메리 올리버

. 시를 읽는 사람들이 너무 적은 것은, 이 겁에 질리고 돈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시의 영향력이 미미한 것은, 시의 잘못이 아니다. 결국 시는 기적이 아니다. 개인적 순간들을 형식화(의식화)하여 그 순간들의 초월적 효과를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시는 우리 종種의 노래다. -메리 올리버. '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중. . 마음산책. 2019 ------------------------------------------- 남은 시간을 살기 위한 준비지만 요 며칠은 꽤나 분주하다. 그저 바쁜 게 아니라 이것저것 따질 것도 많아 머리도 복잡하다. 비 오는 오후에 여행에서 돌아와 늘 그 자리, 침대에 누워 메리 올리버의 산문을 마저 읽는다. 부산한 심사의 나를 위로하는..

비싼 꿈

. #자본주의 넓은 잔디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일. 도시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꿈 같은 것. 현실은 멀어 그저 잠깐 휴가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흉내만 내본다. 꿈을 체험해보는데도 돈이 든다.^^ 이 집 주인은 꿈을 실현하려고 이 집을 지었다는데 감당이 안돼 펜션 영업으로 바꿨다네. ㅎ. 수원에 살면서 손님이 들면 와서 응대하고 수시로 들러 마당이며 집이며 관리를 한다고.. 꿈을 내놓고, 꿈 꾸는 이들에게 잠깐 빌려주며 사는 일. 꿈은 이제 이렇게 거래 속에 있구나. 비는 이틀 내내 내리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빌린 꿈도 반납하고 우리 집으로 가야지. 돈 안드는 꿈이 구석구석 있는 곳으로. ㅎㅎ #비싼꿈 #1009하우스

풀잎 / 월트 휘트먼

. 1855년 휘트먼이 자비로 출판한 시집. 풀잎. 한 시인이 40년 동안 수정과 증보를 거듭한 한 권의 시집. 12편의 詩와 서문이 담긴 이 시집을 그냥 한 권으로 된 詩라 말해도 될 것이고 詩가 아니라고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장시의 형식으로 기록된 소로우의 월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머리맡에 두고 1월 하순에부터 찔끔씩 읽어 오늘에야 다 읽었다. 넉달이 걸렸다. 사람과 삶고 죽음, 자연에 대한 시인의 일관되고 집요한 관찰이 놀랍고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보는 정신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 한편 한편의 詩들이 너무 길어 옮겨 놓지 못한다. 언젠가 한 사흘 정도 한적한 곳에 있을 말미가 있으면 들고 가서 나무 그늘 아래 드러누워 다시 읽고 싶다. 한 호흡으로 읽으면 또다른 풀잎을 만날수 ..

그림과 詩

. 그림과 詩 그림도 詩처럼 누구한테 배워본 적은 없다. 그래도 둘다 오래된 취미다. 대략 중학시절부터 그림도 글도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엔 미술부 문예부를 동시에 나갔다. 그걸로 인생을 살았음 좋겠다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나. 현실은 어림도 없었으므로 그저 취미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은 상대를 갔고 바로 취직이 됐다. 내 보직은 광고과. 어설프나마 그림과 글과 친한게 회사일에 도움이 됐다. 어설퍼도 감각이란게 있었으니까. 그 후론 쭉 광고밥을 먹고 살았다. 詩는 책을 꾸준히 읽는 습관 때문에 오래 곁에 있었지만 그림은 쉽게 다시 시작하기 힘들었다. 십년에 한번 정도 어쩌다 그린 정도. 최근에 오래 써온 詩가 자꾸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 손을 놓고 있다. 그 틈을 비집고 어림없는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 안도현

. 적막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저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 -안도현.창비. 2004 -------------------------------------------------- 읽다보니 읽은 적이 있는 시집이다. 낭패다. 얼른 책꽂이를 확인했다. 없다. 아마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나보다. 그때 읽은 시들이 좋았었나보다. 유난히 시들이 낯이 익으니.. 이런 일 잘 없는데.. 그래서 안도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