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은둔기계 / 김홍중

. '어떤 시대가 오면 아마추어리즘은 소멸한다. 아마추어들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에 실패할 뿐 아니라, 살아남아 있음이 미학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방식으로 생존한다. 애호의 실체가 사심 없는 완상인지, 문화자본의 은밀한 추구였는지, 과시적 소비였는지, 아니면 자기기만이었는지에 대해 준엄한 평가가 내려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창조가 아니라 위로, 도덕도 유희도 아닌 견딤. 우리 시대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자기 자신이다.' - 김홍중. 중에서 3류에게 경고와 위로와 자각을 주는 글. ㅠ

환한 걸레 / 김혜순

. #시한편 환한 걸레 / 김혜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 나무는 여성적이다. 나무 아래서 ..

마산

. 마산 페친들 중에 굳이 아는 척 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 중 몇 분은 경남 서부에 계신 분들이다. 송구한 마음이 많다. 그리고 괜히 뻔뻔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1984년 12월, 봉두난발의대학 졸업을 앞두고 시절이 좋아 취직이 됐었다. 마산에 본사를 둔 한일합섬이었다. 새마을연수원 근처의 연수원에 들어가 한 달 연수를 받고 새해 1월 4일인가부터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한일합섬의 본사는 양덕동 공장이었으니 서울사무소 근무를 한 셈이다. 당시 대졸 신입사원의 직급은 계장이었다. 신입사원이 계장이라니? 나중에 마산 본사에 출장을 와서 알았다. 당시 한일합섬 총 직원 수는 거의 수 만 명. 대부분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직원. 그 위에 관리자가 주임, 그리고 대졸 사무..

밑천

. 밑천 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광고과로 발령을 받은 이래 근 30여 년을 광고밥을 먹고 살았습니다. 누구처럼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있는 대단히 성공한 캠페인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대략 1,000여 개 이상의 브랜드 광고를 기획하고, 만들고 매체에 실었습니다. 정신없이 일하던 어느 순간 마흔이 넘었고 그 바닥에서는 퇴물이 됐습니다. 그래도 배운 도둑질이 광고인지라 그 언저리에서 고군분투하며 한 십년 더 버텼는데 그 또한 한계가 있더군요. 광고바닥에서 A.E (광고기획자)들이 농담처럼 자조적으로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평생 남의 물건을 팔아주지만 막상 제 장사를 할 때가 되면 아무것도 제대로 못해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를 대긴 했지만 광고가 실전 마케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커뮤니케이션 ..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시집 창비. 2006. --------------------------------------- 노숙, 노가다, 가난 같은 조금은 헤진 삶을 더듬는 시인. 현재는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데. 왜 여직 모자란 풍경들이 그의 詩 위에서 궁상을 떨고있는지 궁금하다. 시인은 핍진한 자연의 표정들을 詩에 많이 담는다. 여뀌는 무슨 죄가 있어 그의 詩 속에서 서러울까? 누군가의 말처럼 시절의 뒤켠에 떨어져 늘 모자란 사람들, 풀들을 위로하는 것이 시인의 천명일까? 그럼에도 시집 한 권 속을 지나면 아린 가슴과 금간 슬픔들을 마..

젖은 눈 / 장석남

. 돌멩이들 바다 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했다 잠 아니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장석남시집 중. 문학동네. 2009 ------------------------------------------------- 장석남 다시 읽기 네 권째. 싸리울이어도 좋고 탱자나무울이어도 좋다. 키 낮은 돌담이면 또 어떠랴. 그 발치에 채송화 몇 봉숭아 또 몇 오종종 피어있는 햇빛 가득한 마당이 있는 집. 툇..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신경림엮음

.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건가. 가끔 바람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창비. 2000년 ---------------------------------------------------- 창비시선 200 기념시선집에 실린 마종기시인의 詩 한 편. 우..

낮술의 시절

. 4단계란다. 저녁 여섯시 이후엔 두명만 모일 수 있다 한다. 나 빼고 한명이니 그야말로 독대작만 가능하다. 나는 일대일로 술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도 말도 쉴 틈이 없는 탓이다. 광 팔며 가끔씩 쉬기도 할 수 없는 세 명이 치는 고스톱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꼭 필요한 용무가 있거나 별 대화가 필요없는 가까운 친구 빼고는 가능하면 둘이서만 만나는 술자리는 피하고 어떻게든 한 명을 더 불러 세 명 자리를 만들곤 한다. 근데 그걸 못하게 됐다. 그렇다고 한 잔 생각이 날 때 혼자 집 식탁에 앉아 혼술만 할 수도 없으니 결국 대안은 낮술이다. 오후 네시쯤 만나 한 두시간 마시고 여섯시에 파장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사무실 문연 지 꼴랑 열흘된 형편에 쫄딱 망하기 좋은 발상이지만 뭐 가..

딸과 함께한 마지막날들을 위하여

. 오랜만의 온전한 휴일. 책상 위에 놓인 큰딸이 읽은 책을 읽는다. 어쩌면 제가 다 읽고 나를 읽으라고 내 책상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이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 썩 유쾌해보지지 않은 제목이다.^^ 저자인 필립 톨레다노는 사진작가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백세 가까운 아버지와의 이별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고 짧은 글을 보탠, 거의 사진집에 가까운 책이다. 아버지는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며 최후의 시간을 보낸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안타까우면서도 아쉽다. 오래된 관계의 이별이란 대부분 다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니가 떠난지 이제 열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쉬움은 바지가랭이끝에 매달려 툭하면 나를 잡아 당긴다. 내 큰 딸은 이제 서른셋. 우리 부부는 환갑 코앞. 나도 슬슬 떠날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 / 필립 톨레다노

. 오랜만의 온전한 휴일. 책상 위에 놓인 큰딸이 읽은 책을 읽는다. 어쩌면 제가 다 읽고 나를 읽으라고 내 책상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이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 썩 유쾌해보지지 않은 제목이다.^^ 저자인 필립 톨레다노는 사진작가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백세 가까운 아버지와의 이별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고 짧은 글을 보탠, 거의 사진집에 가까운 책이다. 아버지는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며 최후의 시간을 보낸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안타까우면서도 아쉽다. 오래된 관계의 이별이란 대부분 다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니가 떠난지 이제 열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쉬움은 바지가랭이끝에 매달려 툭하면 나를 잡아 당긴다. 내 큰 딸은 이제 서른셋. 우리 부부는 환갑 코앞. 나도 슬슬 떠날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