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겨울 雪 / 김용택

. 한나절 책상에 앉아 주식시세판과 채 몇 권을 꼬나보다 지쳤다. 베란다 책장 한켠에 먼지 뽀얗게 뒤집어 쓴 작은 책 한 권 집어와서 침대에 드러누워 읽는다. '김용택 시인의 풍경일기 - 겨울 雪'이다. 겨울 풍경 사진이 절반, 시인의 짧은 글들이 절반이다. 생각 한 조각 읽고 시리고 환한 풍경 한 폭 보고 하다보니 삼십분만에 다 읽었다. 지끈하던 머리가 개운해졌다. 김용택이라는 시인. 섬진강변에 사는 키 작은 선생님. 방문을 열면 강이, 앞산이, 나무가, 아이들이, 어머니가 눈에 들어온다는. 그래서 좋다는 시인. 그렇게 좋은 것들을 글로 써서 나같은 여러사람을 느리게, 햇살 가득 담고 흐르는 강물에 띄어주는 시인. 참 고마운 분이란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강변에서 살 수 있으니 얼..

가재미 / 문태준

. . 小菊을 두고 향기는 어항처럼 번지네 나는 노란 소국을 窓에 올려놓고 한 마리 두 마리 바람물고기가 향기를 물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네 향기는 어항처럼 번지네 나는 더 가늘게 눈을 뜨고 손을 감추고 물고기처럼 누워 어항 속에서 바람과 놀았네 훌훌 옷을 벗어 나흘을 놀고 남도 나도 알아볼 수 없는 바람물고기가 되었네 - 문태준 .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2006 -------------------------------------- 문태준, 장석남 등의 시집은 내겐 휴식이다. 어려운 시집 한 권을 읽느라 지친 날이면 이들 시인의 시집을 천천히 몇 번이고 읽는다. 꼬인 언어에 비틀어진 마음이 다시 펴지는 느낌이다. 힘든 일을 하고 난 뒤 잔잔한 바람 지나는 평상에 누워있는 기분이랄까. 이런 詩만 읽으며..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 소문으로만 듣고 언젠가 읽어봐야지 벼르던 수전 손택의 책을 이제서야 처음 읽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지도 몰랐다. 그저 이 시대 가장 영향력있는 주제를 말하는 유명하고 훌륭한 작가라는 것 밖에.. 책은 저널리즘을 넘어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진 미디어(?)들에 대한 통찰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계의 전쟁을 담은 사진들을 통해..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무기력하게 희생되는 한 존재가 담긴 사진의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 진실을 알려 폭력을 억제하는 동력을 만들고자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목적은 달성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사진은 무엇을 위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지는가? 거듭되는 충격은 그저 소비되고 마는 것 아닌가? 같은 질문과 그에 대한 통찰을 작가는 말한다.

가까운 별 내 안의 새들 /지영희

. 풀처럼 한 알로 떨어진 돌 틈에 가을 겨울 끼워넣기 지나는 이들 웃음소리와 발걸음에 심장을 품고 흰 눈 속에서 서늘함의 향기 배우기 시선 한 줄기 없는 길가에 덮치는 봄 비집고 나오는 연두빛 위로 터지는 반가운 숨결에 감사하기 숨구멍마다 꽂히는 빛화살 초록빛 흔들림과 탱탱한 생애 한 줄 걸어 되쏘아보내는 풀처럼 여름풀처럼 살기 - 지영희 . 북인시인선 124. 2020. ----------------------------------- 다른 책을 주문했는데 따라온 시집. 동해안에 사는 시인은 오래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나보다. 20년만에 두번째 시집을 내신 모양이다. 시는 모두 따뜻하다. 누군가의 아내, 딸, 친구, 엄마, 선생님의 목소리들이편안하다. 너무 편안하니 혹자는 문학성이 부족하다 할 수도 있..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 . 운하 수문 이 모든 너의 슬픔 너머에, 없다 두 번째 하늘은. --------- 그것이 천 마디 말이었던 입 하나를 스치며 잃어버렸다 -- 잃어버렸다 내가, 내게 남아 있었던 말 하나를, 누이를. 많은 신들을 믿다가 말 하나를 잃어버렸다 나를 찾던 말을, 카디시. 운하 수문으로 나는 통과시켜야만 했다, 그 말을, 다시 소금물로 되돌려 -- 저 바깥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건져 내기 위하여. 이스코르. -파울 첼란 민음사. 2011. --------------------------------------------------------- 한 달 정도 파울첼란과 월터 휘트먼의 시를 하루에 한 두 편씩 읽었다. 너무도 다른 두 시인의 시들이 만드는 거리는 뒤에 읽는 시를 읽기 힘들게 했다. 절망의 시간을 ..

느닷없음에 대하여

. . 느닷없음에 대하여 묵상 후 연필부터 뾰족하게 깍고 하루를 시작한다. 날카로운 연필심은 詩 몇 편 위에 무뎌질 것이다. 한번도 못봤지만 가깝게 느꼈던 한 사람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느닷없는 이별이 잦다 그 느닷없음 어쩌면 항상 곁에 있는지 모른다 연필이 하루하루 짧아지듯 한걸음씩 다가오는 느닷없음 아침이 왔으니 저녁도 오기 마련이지만 뒤돌아볼 틈도 없이 누군가 사라지는 일은 황망하다 오후엔 미뤄뒀던 치과엘 가야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니 계단을 걸어서 갈 때 가더라도 밥은 먹어야 하니 몇 달치 수입을 끌어당겨서 이빨을 고칠 생각이다 본전 생각이 간절하면 느닷없는 놈도 형편을 좀 헤아리겠지 하면서 210114

시인을 찾아서 2 / 신경림

. . 신경림 시인이 쓴 시인들과 시 이야기 책이다. 역시 오래된 책이다. 소개된 시인들도 오래된 시인들이다. 그간 작고한 분도 있다. 그 중 가장 젊은 시인이 안도현시인이다. 시인은 책을 통해 시인을 소개하고 그 시인의 삶 속에서 솟아난 시들을 소개한다. 앞으로 다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담겼다. 시는 시인의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책을 덮으니 시는 별 기억이 없고 지난 시절 무작정의 삶을 살면서 피를 흘리듯 시를 남긴 노인 몇 분이 어른거린다. 다시는 쉬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 선림원지에 가서 / 이상국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김선우

. . 눈 그치고 잠깐 햇살 지저분한 강아지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던 동해 바닷가 막횟집 평상 아래 눈 그치고 잠깐 햇살, 일어나 몸을 턴 강아지가 저편으로 걸어간 후 동그랗게 남은 자국, 그 자리에 손을 대본다 따뜻하다 다정한 눌변처럼 눈 그치고 살짝 든 평상아래 한뼘 양지 눌변은 눌변으로 완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주 조그맣더라도 조그만 나뭇잎 한장 속에 일생의 나무 한그루와 비바람이 다 들어 있듯이 -김선우 . 2012. 창비시선344. ------------------------------------------------------------------ 작년 년말부터 특별한 이유없이 김선우와 김소연의 詩를 읽고 싶었다. 두 시인 모두 전에 많이 읽은 적 없는 시인들이다. 나와 그렇게 멀지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