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이윤학

. . 샛별 초저녁 아파트 공사장 크레인 위에 샛별이 걸렸다. 어디 하나 바람을 안아줄 나뭇잎 남지 않았다. 반지에 박아놓은 금강석 크레인을 내리면 끌려 내려오지 않을 샛별. 슬픔은 식물성인 것을. 그러나 무엇 하랴. 슬픔이 많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샛별은 사방으로 꼬리를 쳐나간다. 모든 것이 가짜아니냐. -이윤학 . 2008. 문학과 지성. --------------------------------------------- 추운 겨울, 시골에 박혀 산다는 시인. 왜 시인들은 시골에 박혀 사는 걸 좋아할까? 나도 그게 그리우니 시인인가? 역시 오래전 시집이지만 겨울에 읽기 좋은 시들이 많다. 만사 시시하고 진짜는 없다는 목소리 잔잔하다. 촌에는 가짜가 없을까? 요즘 시인의 시들 읽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 . 세수를 하며 오늘 아침 수도꼭지에서 터져나와 물구나무 서서 대야 속으로 온몸으로 쏟아져내리는 물방울들이 맑다 밤새도록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가 금강으로부터 왔으리라 거기 아직도 사람이 사는지 거기 아직도 붉은 꽃들이 피는지 안 피는지 씩씩한 물아 지금은 누구의 밥을 위해 어느 냄비 속에서 몸을 또 바치는가 닌의 곤한 삶이 물을 더럽힌다 가엾은 물 내가 쏟아 버린다 그래 험한 날들이 거듭거듭 닥쳐오리라 -안도현 1997. 문학동네 ---------------------------------------- 안도현 시인의 첫 시집.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실렸다. 나보다 일 년 선배. 고등학교 시절부터 잘나가던 시인.^^ 부러운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이 시인도 혈기..

텅 빈 크리스마스

. #해피크리스마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카드가 왔다. 십 년 이상만에 처음 받은 카드다. 반가운 목사님 이름과 글. 역병의 시대. 모두들 힘들지만 누구 못지 않게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교역자들이다. 난생 처음 겪는 예배 중단. 이분들의 무력감, 낭패감은 얼마나 클까? 교회를 향한 세상의 증오를 견디는 일은 또 얼마나 쓰라릴까? 작지 않은 교회 살림은 어떻게 꾸려지고 있을까? 텅 빈 예배당 아래 좁은 사무실에서 늘 보던 교인들을 생각하고, 마당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을 생각하는 하루하루는 얼마나 낭패스러울까? 이분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떤 기도를 하고 있을까? 나는 이분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해야할까? 텅 빈 크리스마스. 하나님은 이 슬프고 화나는 세상에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계신가? 빈 교회에 ..

검은 시의 목록 / 안도현 엮음

. 83퍼센트를 위하여 모나리자의 얼굴에 나타난 행복감은 83퍼센트 혐오감은 9퍼센트 두려움은 6퍼센ㅌ 분노는 2퍼센트 전문가들은 모나리자가 오묘하고 행복한 미소를 띠는 것은 행복감만이 아니라 혐오감과 두려움과 분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2퍼센트에 기운다 혐오감을 간식으로 먹어 치우거나 두려움을 강물에 흘려보내거나 행복감을 관념으로 찬양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나는 바람 부는 날을 일기로 쓰는 것을 넘으려고 현재진행형으로 투표하는 것을 넘으려고 광장으로 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고 나의 절감분을 찾으려는 것이다 돌멩이 같은 분노를 집어던져 울타리에 갇힌 나의 행복을 깨우려는 것이다 -맹문재 / 검은 시의 목록 / 2017. 걷는 사람 ----------------------..

완벽한 날들 / 메리 올리버

. 머리를 풀어헤친 옥수수밭 옆에서 나는 모른다 해바라기가 늘 천사인지 그러나 가끔 그런 건 확실하다. 그 누가, 제 아무리 천상의 존재라도 원하지 않겠는가 한동안 그런 씨앗 얼굴을 갖는 걸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잎들의 옷을 입은 그 용감한 등뼈를 갖는 걸 여름날 쓸쓸한 시골의 뜨거운 들판에 머리를 풀어헤친 옥수수밭에 서 있는 걸 나는 그 정도는 안다 들판을 한가로이 거닐며 그 얼굴들의 빛나는 별들을 볼 때 나는 말도 부드러워지고 생각도 부드러워져서 상기한다 모든 것이 머지않아 다른 모든 것이 된다는 걸 - 메리 올리버 *2013. 마음산책 ---------------------------------- 여자 소로우라고 하면 적당할까? 페미니즘 측면에서 실례인가?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경이와 기쁨을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