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드므에 담긴 삽 / 강은교 최동호 엮음

.. . 혼자 먹는 밥 / 송수권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뒤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 2006. 서정시학 시인선 01. ----------------------------- 서정시학 시인선을 출발하며 강은교 최동호 두 시인이 당시의 대표시인 80여명의 시들을 골라 엮은 1호 시집. 그 중에서 내 마음이 유난히 닿는 詩는 작고한 송수권 시인, 병환 중인 문인수 시인의 시편이다.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나이든 사람이다. 굳이 그 연륜의 서정을 거부하면서 최신을 아쉬워할 이유가 없다. 나이에 맞는, 내 감정선이 닿는 ..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 황규관

. . 큰 싸움 . . 멀리 돌아다니다 오면 그날 밤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에는 깊은 곳에서 몸살이 찾아온다 너무 많은 길을 욱여넣은 탓일까 빠른 속도로 벌레의 눈빛을 꽃잎의 색깔을 산모롱이에 허리가 휜 냇물을 버리고 온 탓일까 처리해야 할 사무와 변제해야 할 부채와 이루어야 할 약속이 길의 심장을 대체한 탓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속도에 부숴지고 효율과 이윤에 몸을 내어주면, 몸이 먼저 그것을 아는 것이다 높이 뜬 구름도 석양에 가난해지는 강물도 누추한 슬픔이 되는 것이다 죽음도 작아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앓아야만 이 세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버려져야만 몸에 새겨진 굴욕이, 숨을 내쉰다 아픔은 그래서 다른 종으로 넘어가는 끓는 점 같은 것 뼈마디 사이로 불어오는 신의 ..

먼 곳 / 문태준

. . 오랫 동안 깊이 생각함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 문태준 . 2012. 창비시선 343 ------------------------------------- 장석남은 텅빈 시간의 풍경 속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유홍준은 시간의 한 토막 속에 새겨진 고통을 녹슨 못 끝으로 그리고, 황동규는 조용히 흐르는 풍경의 끄트머리에 서서 어느 속의 말을 무심하게 꺼내고, 윤제림은 나무 그늘에 ..

포옹 /문태준 엮음

. . 손 털기 전 . 누군가 말했다. '머리칼에 먹칠을 핻ᆢ 사흘 후면 흰 터럭 다시 정수리를 뒤덮는 나이에 여직 책들을 들뜨게 하는가, 거북해하는 사전 들치며? 이제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땐데.' 밤중에 깨어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미래를 향해 책을 읽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빨리 비워지고 헐거워진다. 날리는 꽃잎들의 헐거움, 어떻게 세상을 외우고 가겠는가? 나는 익힌 것을 낯설게 하려고 책을 읽는다.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 지면 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이다.' 우주 뒤편은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일 것이다. 노란 꽃다지 땅바닥을 기어 숨은 곳까지 따라오던 공간일 것이다. 노곤한 봄날..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빚나다

. . 굴비 노인은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편지함에서 떨어진 우편물처럼 마당 바깥쪽에 낮게 엎드린 노인은 왼팔의 극히 일부만을 파란 대문 안쪽에 들여놓은 채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노인의 오른팔에 쥐어진 검정봉지엔 비틀비틀 따라왔을 술병이 숨막힌 머리를 겨우 쳐들었다 처마 밑에는 누군가 보내준 굴비 한두름이 대문 틈 사이로 밀려지던 손가락을 지켜본 듯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내려온 핏줄들이 술렁이는 동안 노인은 마당 밖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다 집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노인 옆에 있던 무전기가 반복해서 말했다 부검된 노인이 방안으로 옮겨지기 전부터 흑백사진 앞에 나란히 뉘어지던 굴비는 뜬눈으로 조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잔치 내내 생볏짚을 먹어야 했던 암소가 트럭..

소견머리

. 소견머리 저자는 내 고등학교 선배이다. 문예부 모임에서 한 두번 본 기억은 있지만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공직 생활을 마치고 수필을 꾸준히 쓰고 작은 책도 매년 한권씩 펴내고 있는 분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우편으로 보내주시는데, 주소는 우리 집이지만 수신인은 또 다른 선배님이다. 반송도 어렵고 해서 그냥 두고 있는데 읽어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읽을 책이 밀려있는 탓이 크지만 그보다는 이 선배의 처신이 맘에 들지않은 탓이 더 크다. 선배는 고교 문예부 오비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본인 책이 나오면 그 모임 멤버 전체에게 책이 나왔음을 알리고, 어디 기사라도 나오면 그것도 알뜰히 링크해서 알려준다. 그게 맘에 들지 않는다. 공동체는 함께 만드는 것인데 이 분은 공동체를 이용만 한다는 ..

서해의 일출 /김국현

. . 저자는 내 고등학교 선배이다. 문예부 모임에서 한 두번 본 기억은 있지만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공직 생활을 마치고 수필을 꾸준히 쓰고 작은 책도 매년 한권씩 펴내고 있는 분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우편으로 보내주시는데, 주소는 우리 집이지만 수신인은 또 다른 선배님이다. 반송도 어렵고 해서 그냥 두고 있는데 읽어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읽을 책이 밀려있는 탓이 크지만 그보다는 이 선배의 처신이 맘에 들지않은 탓이 더 크다. 선배는 고교 문예부 오비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본인 책이 나오면 그 모임 멤버 전체에게 책이 나왔음을 알리고, 어디 기사라도 나오면 그것도 알뜰히 링크해서 알려준다. 그게 맘에 들지 않는다. 공동체는 함께 만드는 것인데 이 분은 공동체를 이용만 한다는 생각이..

미드웨이를 보면서

. 미드웨이를 보면서 욕망과 (허위) 영화를 보며 생각한 두 단어다. 태평양전쟁 미드웨이야 오래 전 버전으로 본 적이 있고 새롭게 스펙타클을 더해 볼만하다고 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아메리칸 드림, 팍스 아메리카나를 고양하는 웅변 밖에 메시지는 없다. 그래도 재미 있는 건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 쟝르의 미덕이다. 전쟁 영화는 참 오랜만에 봤다. 사실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아무 생각없이 두 시간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나 무협, 갱스터, 에로 영화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데 왜 자주 안보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좀 민망하다. 깊이가 없어서, 너무 상업적이어서, 인생에 별 도움이 안돼서 같은 이유를 떠올려 본다. 돌려말할 것 없이 폼나지 않아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그때 그사람들

. . 그때 그사람들 오늘 페친들의 글에 그때 그사람들의 요즘이 많이 보인다. 고종석, 유종호, 홍세화.. 한 때 공감되는 글로 만났던, 나름 선명했던 사람들. 지금은 다른 곳에서 희미하게 선 사람들. 다 뜻이 있고 이유가 있겠지만 내 선 자리와 머니 낯설다.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편 궁금은 하다. 십여 년전쯤, 노통 돌아가시기 직전, 진석사 등이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본다. 어떤 징조에 대한 일말의 공감은 있다. 이른바 '빠' 신드롬에 대한 경계였는데 지금은 그자리에서 함몰되어 그를 빠뜨린 늪이 된 것 같다. 스스로의 선명성에 집착한 논리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들. 광고에서는 차별화를 위한 차별화 라고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