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 김종철

. . 이 양반 얼마전 돌아가셨다. 저자가 떠난 후에 뒤늦게 책을 읽는 일은 괜히 미안하다.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읽어 덜 미안하기도 하다. 신념을 실천하며 인생을 산 한 사람을 돌이켜보는 일은 경이롭다. 그 신념이 지향하는 통찰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결국 세상은 선생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갈 것이다. 그때, 그의 신념은 실현되겠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고 그 길을 따라가는 일을 통해 그 시간의 단축에 먼지만큼이라도 보탬이 되자 생각해본다. ------------------------------------------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대체로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책임 문제는 회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전체와의 ..

인상과 편견 / 정명환

. . 조성을 파괴한 현대음악의 효과는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이 가져오는 기괴한 매력에 있다. - 추상화와 난해詩 또한 그렇지 않은가? 독자는 한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의무를 걸머질 필요는 없다. 텍스트는 독자의 주체를 지배하거나 통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 하여금 전혀 엉뚱한 영역을 향해서 自己展開를 하게 할 수 있다. - 맞는 말이다. 텍스트는 내게 의무를 강요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강박과 열등감에 빠져 억지로 읽을 뿐.. 예술작품은 도리어 서로 다른 여러 사람에 의한 원심적 확장을 통해서 그 존재 의의를 획득한다. 예술작품이 애초에 겨냥하지 않았던 엉뚱한 수용자들에게 엉뚱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것이 누릴 수 있는 아이로니컬한 특권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안도현

. . 시인은 이제 예순, 예천에 자리 잡았다 하더군. 아직도 그리 외로워 보이진 않더군. --------------------------------------------- 마흔 살 내가 그동안 이 세사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쓰레기 봉투로도 써먹지 못하고 물 한 동이 퍼 담을 수 없는 몸, 그 무게 불린 일 병산서원 만대루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와이셔츠 단추 다섯 개를 풀자, 곧바로 반성된다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때가 바야흐르 마흔 살이다 바람이 겨드랑이 털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고 꾸역꾸역 나..

계급.

결국은 계급의 문제다. 계급은 계급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 전력한다. 계급의 특권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에 계급은 최선을 다한다. 계급이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계급의 동력은 자본이다. 계급의 형태는 다양하고 서로 견제하는 듯 하지만 지향은 동일하므로 궁극적으로 협력한다. 공격하지만 돌아서서 사과하고 전략을 공유한다. 계급은 아래에서 올라올 수 있는 사다리를 경계한다. 수렴된 계급은 계급의 공고함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의전원, 로스쿨은 계급이 쌓는 노골적인 벽이다. 계급의 후세는 무지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경험이 원천적으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계급의 혜택만 학습되고 계급을 계승하는 기제에 의해 키워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든 고시는 ..

탁월한 사유의 시선 / 최진석

파주로 다시 출근한지 일 년 하고 3개월이 거진 다됐다. 다음 주면 다시 그만 둔다. 아마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파주에 머무르는 시간이 생길 것을 전혀 에축하지 못했던 것처럼, 또 어떤 일이 있을 지는 모른다. 도합 4년 여의 파주 생활, 자유로 강변을 달리는 출퇴근이 즐거웠고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과 임진강의 만남(交河)이 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무엇보다 다소 여유로운 업무 덕분에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올해만 해도 얼추 160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파주 사무실서 읽은 량이 대부분이니 회사 입장에서는 월급을 축내는 불량 직원인 셈이다. 잘려 마땅하다. 8월말까지 츨근하기로 했으니 한 닷새 남았다. 그 중 쉬는 날을 빼면 오늘 포함 사흘, ..

180317

이유도 잘 모르면서 미안하다 그런 꼴이 싫어 화를 냈다. 나도 그 따위 내 모습을 싫어한다 띄엄띄엄 당신이 하는 말을 생각하면 요즈음이 당신에겐 어려운 시절 같이 만든 세월이지만 당신 혼자에게 남은 흉터 같은 것 그런 줄 잘 몰랐다 이런 말도 당신한테는 잘난 적이겠지 나는 내가 싫다 왜 여기 있는지, 왜 이 꼴로 있는지 나 혼자 이 따위로 사는 지 왜 가족까지 괴롭게 하는 지 더 잘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그럴 수도 있었는데 나는 지금 왜 여기 있는 지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힘 들었을 젊은 날 당신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꿈 속을 사는 남편을 보는 당신 아직 완전히 나는 꿈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이고 당신 남편이다 그건 죽을 때까지 힘들지 않을까 미안한 일이다 사랑을 기본으로 한 배려, 친절..

채근담 / 홍자성

. . 파주에서의 한 시기를 마무리할 일 주일. 채근담을 다시 읽는 일로 마음을 갈무리한다. 모두 다 고마운 시간이었다. 하늘은 맑고 달은 밝으니 어느 하늘이나 날아 갈 수 있건만, 불나방은 굳이 밤 촛불 속으로만 달려든다. 샘물은 맑고 대나무는 푸르니 무엇이나 먹을 수 있건만, 올빼미는 굳이 썩은 쥐를 먹을 뿐이다. 아, 이 세상에 불나방이나 올빼미처럼 살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 . 24년 만에 다시 읽어보는 시집 속갈피에 이런 글이 적혀있다. 시집을 읽고나서 문득 이전에 알았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그때 그들과 숱한 이야기를 나누고 즐겁기도 속상하기도 했으리라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지금 내게 그들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 알고있는 사람들은 또 시간이 지난 후에 어떤 의미일까? 1996. 12. 4 삼십 대 시절. 그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갔으면 삶이 꽤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무언가를 우직하게 밀고 가질 못한다. 그래서 24년 전 시집이나 먼지 털어가며 읽고 있나보다. 류시화 시인은 이때 벌써 애늙은이가 되어 있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