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은밀한 생 / 파스칼 키냐르

. 참 오랜만에 장편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소설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럼 뭐라 해야 하나? 500쪽 짜리 詩? 10 년전쯤. 광화문에서 김경주시인한테 詩 공부를 할때 시인은 詩 공부를 한다면 반드시 읽었어야 할 작가 몇 명을 말했었다. 하이데거, 옥타비오 파스, 가스통 바슐라르, 모리스 블랑쇼 등이었다. 그때 나는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었다. 지금은 이해불문 한 번씩은 읽었다. 그리고 詩와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만나볼 작가로 하이리히 뵐과 파스칼 키냐르를 추천했었다. 그후 그들의 책도 읽었다. 파스칼 키냐르. 그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으로 처음 만난 작가. 소설가이지만 소설의 형식으로 詩를 쓴다고 생각했던 작가. 그저 그의 이름에 끌려 이 책을 읽었다. 480쪽의 장편 소설을 통해 키냐르는 '사랑은 ..

예수는 스테반을 기다린다

예수는 스테반을 기다린다. 우리가 늘 바라보는 십자가. 세로로 길고 가로는 짧은 나무 두 개가 직각으로 꿰인 구조체. 그 곳에 예수가 못박혀 죽은 상징은 강력하지요. 십자가의 세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가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메시지의 상징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속된 생각으로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보다 좀 더 하란 의미로 세로가 길다 생각하구요. 아, 가로 세로 길이 같은 십자가가 오리지널이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예수는 성경 신구약의 전 메시지가 구조체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진정한 복음의 가치를 영원히 남겼지요. 그저 나무로 만든 종교 공동체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의 로고스가 고스란히 새겨진 십자가가 온 천지에 홍등가 불빛처럼 싸구려로 빛나고 있는 현실은..

아침의 피아노 / 김진영

건너가기, 넘어가기, 부드럽게 여유 있게. 적요한 상태. 내 마음은 편안하다. . . . 철학자 김진영의 병상 메모. 임종 3일 전까지 병상에 앉아 이 글들을 썼다는데. 멀지 않은 시간이면 우리게도 다가올 시간. 그 언저리에 서면 나 또한 비슷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 자꾸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위안을 주려는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게 된다. 병을 앓은 일이 죄를 짓는 일처럼, 사람들 앞에 서면 어느 사이 마음이 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환자의 당당함을 지켜야 하건만.... 희망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 그런데 그 희망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야 – 카프카 / 희망변증론 나는 존재의 바닥에 도착..

그 모든 가장자리 / 백무산

허수아비 주정뱅이 노인이 죽자 마을에는 귀신이 자주 출몰했다 노인이 사라지자 마을 공기가 가라앉고 사람들 눈길이 닿지 않는 구석이 부쩍 늘었다 노인이 떠나자 집들의 담장 높이는 하뼘이나 자라났고 큰 소리로 떠들기보다 귓속말이 많아지고 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살림의 해진 밑바다게 시커먼 헌데가 자꾸 드러나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였다 마을의 소음을 도맡아 일으키는 골치거리였으나 노인의 이상한 혼자말이 폐가를 돌아다니고 죽은 짐승들을 파묻은 썩은 구덩이를 들추고 음산한 다리 밑을 헤집고 다녔었다 가뜩이나 아이들 소리도 떠나고 없고 밤마실 끌고 다니던 이야기꾼 할머니도 작년에 떠나고 동네 궂은 욕을 도맡던 반벙어리 늙은이도 떠난 뒤에는 어두운 헛간이나 골목에서 귀신들이 사람들을 자주 놀래키었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사진관집 이층 / 신경림

. . 다시 느티나무가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신경림.. 창비. 2014. ------------------------------- 세월이 많이 흘렀다. 흙 묻은 가락으로 農舞를 추던 시..

옆구리의 발견 / 이병일

일획의 꼬리가 굽어 빛나고 흐린 댓잎들이 몸을 뒤척이는 저녁 대숲은 커다랗고 깊은 뒤주인 듯 했다 독 긁는 소리로 우는 능구렁이, 온몸의 숨구멍 활짝 열어놓았는지 신열도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서 있다 아랫배 한 가운데의 꽃비늘이 너무나 묽다 쥐새끼라도 거룩히 잡아먹은 것인가 대가리를 무엇엔가 찢겨 표표하다 생계를 잇는 일은 몹쓸 죄로 허물을 벗게 하는 것이다 분분한 바람이 장독대를 돌아 능구렁이 낯짝을 댓잎보다 맑게 씻겨준다 제 몸에 가시가 많아 찔려오는 통증 같은 울음이 어둠을 불러오는가 그때 일획으로 뻗친 꼬리가 굽어 빛나고 - 이병일. . 창비. 2012

끄트머리 증후군

끄트머리 증후군 휴무, 년차를 섞은 닷새 휴가가 끝나간다. 책 몇 권 읽었고, 식구들과 좋은 시간도 보냈다. 돌아갈 세상은 역병이 되살아나 흉흉하고, 사람 아닌 사람들의 악다구니도 여전하다. 내일 아침 알람이 울리면 늘 가던 곳으로 갈 것인데, 그 곳이 如一할지는 알 수 없다. 세상 탓이 아니라 내가 그 세상에 如一하기엔 부족한 사람이 된 탓이다. 길이란 늘 어딘가로 이어지니 이 길 끝나면 딴 길 무던히 걸을 것이다. 단지 그 갈림길이 막연히 예감될 때 느끼는 약간의 우울 같은 것이 휴가 끝에 매달렸다. 사실 내일 이 시간이 되면 아무 것도 아닐 그런 것들. 세상에 목메여 사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유치한 멜랑꼴리.. 200817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릴케

. . 나는 작품을 만들 때마다 항상 그랬던 것 같소. 눈으로는멀리 있는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손은 혼자서 자기 일을 하는 것 말이오. 또 당연히 그래야 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소.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나는 지금처럼 고독하게 있어야 하지. 우선 내 고독은 다시금 확고하고 안전한 것이 되어야만 하오. 원시의 숲처럼,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두려워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아야 하오. 그 고독은 모든 악센트를 잊어야 하며, 어떤 예외적인 가치나 의무감도 잊어야 하오. 그리하여 고독은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그리고 아무리 잠깐 동안이라도 나를 찾아오는 생각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와 단둘이서만 만나야 하오. 그래야만 그 생각은 나를 믿으려 할 거요. 근본적으로 인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