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 2210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훌륭한 책이 있다. 저자는 이미 죽었고, 책만 남았다. 어떤 경우 사람이 남은 것보다 책이 남아있음이 더 소중할 수도 있다. 많은 고전이 그렇다. 생각이 언어에 실려 시간 앞에 놓여진다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저자는 독일인이다. 독일어는 어렵다. 관념에 관한 한 특히 더 어렵다. 최고의 수요자가 최고의 상품을 창조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감사했다. 배수아라는 안목있는 수요자가 독일인의 난해한 관념을 유려하게 번역했다. 그가 아니었음 읽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피카르트의 대표작 '침묵의 세계'는 최승자시인이 번역했다. 그 또한 같은 경우다. 거듭 감사한다. 정신의 보물상자를 나눠주심에 감사한다. 말, 언어, 침묵, 음악, 그림, 詩. 피카르트는 이것들이 인간의 근원이라 말..

참 맑은 물살 / 곽재구

. 흙과 뻘에 뿌리를 내린 삶이나 시간은 사람의 목구멍에 가락을 새기나보다. 그리고 그런 쌓임은 아무래도 나같이 퍽퍽한 경상도 사람들보다는 들도, 강도, 바다도 질펀한 남도 사람들에게 더하나보다. 사평역 톱밥 난로를 쬐던 서러움들은 먼 바다의 소금냄새가 비치는 남도 마을 육자배기 인생들에 슬어 시집 가득 가락으로 흐른다. 서럽지만, 서러워서 깊은, 제각기 염장된 사람들. 짠물 흐르는 마른 주름을 구기며 웃는 얼굴들. 그 곁의 탁주 냄새. 하늘 한 켠으로 저혼자 흐르는 만가. 그 사이로 질퍽한 논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헐렁한 그림자의 시인이 보이는 듯. 만가 - 금노에서 갈대꽃들이 진양조의 가락으로 산비탈을 오르고 있네 서러운 석삼십리 강물로 돌아가는 길 어허이야 한세상 뜬구름처럼 살았네 어허이야 한세상 범..

10년 동안의 빈 의자 / 송찬호

. 강 강물이 스르르 흘러와 나를 묶어놓고 묶어놓고 흐르지 않는다 눈앞에는 무심한 빈 배만 오락가락 물 위에 드리워진 허연 수염발은 휘휘 늘어져 삼천 척 얼마나 잠이 깊어야 저렇게 파란 고기눈으로 뜨일런가 밭은 입질로도 찌 한 점 흔들어 깨우지 못하니 사공이여, 갈 길은 먼데 어느 월척을 기다리는지 꿈결인 듯 점점이 靑山이 떠내려와 굽이를 이루고 멀리 기슭까지 갔다 돌아오는 물결의 이마를 만져보니 어느덧 주름진 한 甲子! 아, 편편히 노니는 저 흰 물새들이 물살 한 부리씩 긋고 날아가 절벽을 친들 잠시 잠 깬 이승의 내력을 어느 시절 다 쪼아 새길 수 있을꼬 차라리, 이 목을 치소서 --------------------------------- 최근의 詩로 처음 만난 시인의 오래 전 詩를 만나는 일은 대부..

답답한 시간

답답한 시간 휴일 오후 한 시. 반드시 해야 할 일 아무것도 없는 시간. 커피도 마셨고 좋아하는 장석남시인의 시집과 전부터 읽고 싶었던 막스피카르트의 책을 곁에 두고 있는데 잘 읽을 수가 없다. 비는 참 집요하게 오고 거실 TV는 혼자 떠들고 온갖 뒤숭숭한 전망들은 목청을 돋우고 책이나 읽으며 가만 있을 때가 아니다 한다. 아파트, 검찰, 진중권, 집중호우, 코로나 섬진강처럼 범람한다. 왜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이렇게 헤집나? 가만 있는 나를 준동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나? 내 말을 들으라. 왜 고함들만 지르나? 나는 그저 고요하고 싶은데, 왜 자꾸 내 머리를 쥐고 흔드나? 200809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 류시화

. 우리의 인생 자체가 오디세이아다. 수많은 모습의 살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인생 자체이다. 뭔가가 되려고 하지말고 지금 겪고 있는 이 순간의 즐거움과 아픔, 그 드라마틱함을 있는 그대로 즐기라.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목소리의 크기는 가슴과 가슴 사이의 거리에 비례한다. 그리고 소리의 크기만큼 더 멀어지는 관계가 된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 짐코벳. 인도의 식인호랑이 사냥꾼. 나는 타인이 말하는 ‘누구여야만 하는’ 나가 아니며, ‘어디에 있어야먄 하는 ‘ 나가 아니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이므로 매 순간 다른 나이고, 어디에 있을지 스스로 결정하는 나이다. 따라서 타인이 생각하는 나나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

우리나라 풀 이름 외기 / 송수권

. . 詩를 끼고 산 지는 제법 오래 됐다. 하지만 제대로(?) 詩를 배운 적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선배들에게 몇 토막 배우고, 십 년 전쯤인가? 스무 시간 정도 한 김경주시인의 시창작교실에 다닌 게 누군가에게 詩를 배운 전부다. 그러니 새 詩라는 건 결국 혼자 끄적인 자폐의 흔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한 삼십 년 전쯤 됐으려나? 광화문 교보에서 송수권시인이 쓴 '송수권의 체험적 시론'이란 책을 샀었다. 詩와 관련해서 시집과 문예지 외에 처음 산 詩창작 가이드북이었다. 몇 년 동안 여러 번 읽었던 것 같다. 각 장이 끝나면 시인이 남겨준 숙제도 풀고 했었다. 내 블로그 어딘가에 그 숙제로 쓴 '나무'라는 詩가 남아 있는걸 얼마전 갈무리를 하며 발견하기도 했다. 어쨌던 그 책과 송수권시인은 ..

암호 /장 보드리야르

. 우리가 사는 현대에 대해 깊은 사유를 보여주는 보드리야르가 2000년 펴낸 얇은 책, 암호.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유는, 방대한 저자 자신의 저작들에 나오는 핵심 용어들을 간단히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보드리야르 사유의 전체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 수준에서는 이해가 힘드는게 당연한 것 같다. 책 읽기는 늘 여러모로 만만치 않다.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 의 원 소유자, 그리고 현대를 관통하는 가상의 세계 등에 대한 보드리야르에 다가가기 위해 대략적인 체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입문서가 되리란 기대로 선택했지만 오히려 우뚝우뚝 서있는 기둥들 아래서 밑둥만 더듬는 읽기가 돼버렸다. 들뢰즈나 하이데거에 접근할 때 썼던 방법이 이 경우엔 적절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별 수 없으니 主著를 돌파..

절름발이

절름발이 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다리가 짧고 가늘다. 그래서 걸을 때 전다. 요즘 말 많은 절름발이다. 사는 동안 꽤 불편했고 나이가 들면서 그 정도도 조금씩 더해가고 있다. 국민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의 놀림도 좀 받았다. 그 녀석들은 '절뚝발이'라고 불렀다. 그때 생각으론 내가 지들보다 공부를 잘해서 놀리나보다 했었다. 그 후로 오십 년 동안 다리 전다고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기형적인 다리를 보여주기 싫어 고등학교때까지 공중목욕탕을 가지 않았다는 것과 점멸 신호에 횡단보도를 잽싸게 달려 건너지 못한다는 정도가 불편함으로 남아있다. 절름발이, 절뚝발이 라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기는 한다. 그 또한 내 정체성의 일부인 탓이리라. 부조화, 부적격을 비유하는 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