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두려움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1. 1988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먼저 열렸는지 세계청년축전이 먼저 열렸는 지는 모른다. 소주와 라면은 먼저 배편으로 떠났다. 한 달 뒤. 나리타에서 갈아 탄 아에로플로트는 내려 앉는 태양을 좇아 검은 시베리아를 오랫 동안 날았다. 레닌그라드에 산다는 사.. 詩舍廊/~2021습작 2019.12.25
내가 사는 곳 내가 사는 곳 하루가 쉴 새 없이 드나든 껍질 하나 자정이 넘어서야 문을 닫는다 반질하게 닳은 내피(內皮)는 그제서야 한 모금으로 가장 깊은 상처를 적신다 빈 곳으로 감겨오는 덩쿨들 이 악물고 고개 흔들어 떨치면 꼬리를 물고 기어오르는 또 다른 머리 바늘 박힌 덩쿨손이 사방에 꽂.. 詩舍廊/~2021습작 2019.12.25
구멍 구멍 겨울의 한 귀퉁이가 얇아진다 이마 위로 썰매를 타는 조무래기들 뒷꿈치가 손에 닿을 듯하다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자 살짝 들리는 하늘 살얼음 사이로 기억이 비집고 나온다 뚝방끝 질기게 나부끼는 수양버들 아래 폐타이어 더머는 어제보다 더 삭았다 작고 동그랗게 입을 열어본.. 詩舍廊/~2021습작 2019.12.25
길 위의 저녁 길 위의 저녁 일곱 시에 겨울 파주를 나서면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두 시간 강이 더 이상 거슬러 오르지 못하는 곳 산의 발치에 닿을 즈음이면 저녁은 벌써 떠나고 없다 부은 발을 씻고 시래기 풀린 청국장 한 술로 하루의 거친 속을 채우면 어느새 밤은 깊을 터 다행히 오늘은 이 밤을 새.. 詩舍廊/~2021습작 2019.12.04
걸레 걸레 태울 사람 기다리느라 잠시 멈춘 사이 운전석 옆 문 포켓에 코푼 휴지처럼 구겨진 걸레를 본다 이 아침 덜 펴진 내 생활같아 차곡차곡 접어 곱게 놓는다 오늘 유난히 아픈 발목도 저렇게 차곡 접어 안녕토록 할 수 있다면 마음 곱게 하루를 살 수 있을텐데 이것저것 닦느라 꼬질해진 .. 詩舍廊/~2021습작 2019.11.30
배웅 배웅 걷기 좋은 계절인데 굽은 발목은 여전히 비틀대네 이른 달이 반쯤 하늘에서 빛나고 길따라 바람 몇 줄기 앞서 가는데 몇 걸음 걷다 멈춰 발목 위로하며 조 앞 누군가를 만날 곳을 바라보는데 그대 어깨를 짚네 요만큼이라도 걸을 수 있지않나? 우리는 내처 한 계절 달렸어도 여전히 .. 詩舍廊/~2021습작 2019.10.09
화석정 화석정 외근 나갔다 돌아오는 길 일부러 차를 돌려 화석정을 찾았다 가까이 있는 친구를 오래 찾지 않는 건 무례란 심정으로 오래 묵은 느티나무와 향나무 사이 허여멀건 정자로 서있다. 불타며 비춰줬다는 임금님 도망길은 저 멀리 굽실거리며 흐르고 있고 동란의 총알이 박힌 느티나무.. 詩舍廊/~2021습작 2019.09.25
안달 안달 국민학교 친구들이 기차타고 남당항으로 소풍을 가서 낮술이 한참인가 보다. 빨리 오라고 성화다. 나는 일하는 중인데.. 퇴근하고 가면 이 놈들이 살아있을까? 취한 놈들 뒤치닥거리만 하는 거 아닐까? 그래도 가고싶다. 빨리. 비오는 바다가 있고, 빨갛게 익은 새우와 전어가 있고, .. 詩舍廊/~2021습작 2019.09.21
루틴 루틴 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 성경 다섯 장을 쓴다. 잠깐 묵상하고... 책상 귀퉁이에 꽂아둔 시집 대여섯 권을 차례로 뽑아 한 두 편씩 읽는다. 시집은 가지각색이다. 지금 꽂힌 시인들은 문태준, 고영민, 김혜순, 정호승, 김신용, 김현, 라이너 쿤체다. 이를 악물고 매일 읽는 시인도 .. 詩舍廊/~2021습작 2019.09.17
추석이라고 추석이라고 오십칠 년 전, 첫 배 아파 낳은 큰 아들네 저녁에 왔다 아침에 가신다 오십이 년 전 두번째 배 아파 낳은 둘째 아들 손 잡고 내 속으로 낳아 내 손으로 키운 자식인데 며느리 손녀들에 빼앗겨 손님처럼 다녀가신다 이제 그만 죽어야하는데 십 년 전부터 외워 온 주문 어김없이 .. 詩舍廊/~2021습작 2019.09.13